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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공수래 공수거”
  • 기사등록 2011-02-01 11:21:21
  • 수정 2014-12-04 17: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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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 요즈음 세월이 어찌나 삭막하게 지나왔던 것인지 마치 바람 부는 사막을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듯합니다. 엊그제 추석 명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틈엔가 설날이 눈앞에 닥쳐 있습니다.

이번 명절에도 크게 흔들리는 자연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차례상에 대한 부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능력껏 준비한 음식들에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을 보탠다면 풍성한 상이 될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명절이 기다려지기도 하겠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명절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가진 자나 부족한자나 작은 것일지라도 서로 나누어 꾸려가는 현명하고 풍요한 명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인데 그때는 부자 집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었고 나머지는 모두 고무신을 신었던 시절인데, 그것도 생각 없이 신다보면 바닥이 다 들어날 때까지 신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해 늦은 봄 광주에서 개최된 “남도문화제”인 것으로 기억하고, 각 시군별로 사물 놀이패를 조직하고 광주 시내를 행진하는데 저희 꼬마들은 영문도 모르고 시. 그림. 산문으로 나뉘어 백일장에 참여하기 위하여 행사장을 향하여 뒤를 따라 다닌 기억이 납니다.

비조차 내렸고 그때는 비포장의 도로가 온통 흙탕길인데 하필이면 저의 고무신의 바닥이 견디지 못하고 구멍이 나고 만 것입니다.

양말 사이로 파고드는 검은 갯벌과도 같은 흙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다른 동료들이나 여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사실을 숨기고 다니는 동안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생각지도 않았던 구세주가 나타났는데 나중에 용케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행사장에 연락도 없이 따라 와서 저에게 최고급 노란 고무신을 사주신 것입니다.

행사장을 뽐내며 천하를 얻은 듯 광주 시내를 활보하고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백일장을 마치고 학교에 등교를 하였는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자랑스러운 고무신을 찾았으나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으며, 새로 장만한 때로부터 딱 3일 만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맨발로 집에 돌아가는 내 처지도 한심스럽지만 대용 신발도 없이 집에 당도한 저를 보고 누나와 동생들 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답답한 마음으로 쳐다 볼 뿐이었습니다.

신발 집으로 아버님을 따라가서 이번에는 전보다 약간 싼 검은 신발을 한 켤레 얻어 신었는데 “이번에 또 잃어버리면 다시는 안 사 준다”고 하시는 것을 앞으로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 다음날은 무사히 보냈지만, 이틀이 지난날 그렇게 많은 신발 중에서또 다시 누가 내 신발을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어린 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버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또 새 신발을 사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의 신발 가게 아들인 약 7년 정도 나이가 어린 후배를 2008년도 광주에서 만났는데 오래전에 보았던 가족관계를 일일이 다 말하자 후배가 나에게 기억력이 놀랍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때의 아픈 추억만큼 가슴에 쓰리게 각인된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 이후로도 물건에 대한 나의 집착이 너무나 미약하였는지는 몰라도 나의 손을 거치는 물건들을 잃어버리는 데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지경이었고, 더구나 가지고 있어도 정작 필요한 시간과 장소를 잘 맞추지 못하다보니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매 한가지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낚시를 다니면서 모자에 다는 등을 선물도 받았고 여러 차례 구입도 하였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없어서 손전등으로 대신 사 놓고사용하다가 다음번 필요할 때에는 자꾸만 잃어버리고 출발을 하여 가는 도중에 하나씩 구하다보니 똑같은 제품이 대여섯 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우산은 비올 때 가지고 나가 비가 그치거나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언제나 빈손이었습니다.

자꾸만 빈손이 싫어 아예 우산을 안 들고 다니기도 하였지만 쏟아지는 비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살 수밖에 없었는데, 볼일을 마치고는 그대로 두고 온 적이 부지기수이고 어쩌다 친절한 주인을 만나 5개월 만에 우산을 찾기도 하였지만 잃어버린 우산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겨울에도 자꾸만 장갑과 모자를 잃어버려 어지간하면 그대로 다니는데 이번겨울은 혹독하여 눈도 많이 쌓여 병원에 가는 길에 차편도 없이 걸어 다니면서 하도 추워서 털모자와 가죽 장갑을 사서 열흘 정도 잘 쓰다가 또다시 그 종적을 알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살이 “공수래 공수거”라고는 하지만 어쩌다 보면 너무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어느 날 석양 무렵 우연히 길을 걷다가 한쪽은 “500원”이고 다른 한쪽은 “학”인 500원짜리 동전을 길에서 주운 적이 있는데, 평상시 “공수래 공수거”의 정신이 몸에 베어 있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동전을 주운 뒤로 도로에 500원을 닮은 자국이 그렇게도 많은 것을 난생 처음 알았습니다.

누군가 껌을 씹다가 버린 것이 둥그런 모습으로 보도에 점점이 찍혀 있는데, 그 자국이 모두 500원 동전으로 보여 잠간 동안 걷는데 애로를 느꼈습니다.

사람의 집착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는 모르지만 500원 동전 한 개가 저의 마음을 이토록 흔들어 댈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2년 무렵 친구들과 시골길을 가는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달리는 차에서 복숭아 상자를 끌어내어 길바닥에 떨어진 것을 모두가 하나라도 더 주워들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많아야 7-8개 정도 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것도 맨손으로는 들 수가 없어 가려운 것을 극복하고 런닝셔츠 안에다 주워 담아야 그 정도 밖에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젊어지고 몸은 늙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연유로 탐욕이 늘어만 가는지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형님은 은행 간부로 지내다가 명예퇴직을 하신 후 사업에 실패하고 초야에 묻혀 사시는데 그나마 은둔의 공간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데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를 하였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라리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가진 게 없으면 안 쓰면 되는 것이라고 초연하게 대처를 하시는 것으로 너무나 진한 감동을 받았으며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습니다.

형님의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을까 더 이상의 질문을 드릴 수도 없거니와 속내를 짐작만 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의 마음이 이토록 성숙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뜨거운 격정이 온몸을 휘감아 돌아 내렸습니다.

1993년도 제주도에서 친한 친구가 일제 낚시 대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나중에 가져가겠다고 말해놓고는 발령을 받아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참이 지난 뒤 전화상으로 낚시 대는 어떻게 하려는 지를 묻는 친구에게 우도에서 절친하게 지냈던 경찰관에게 주면 나에게 준 것과 같다고 하여 친구도 그 약속을 어기지 않고 이행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 손에는 어차피 낚시 대는 없지만 친구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은 틀림없고 내가 친절했던 사람에게 또다시 선물을 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빈손 임에도 흐믓한 일입니다.

어느 날 우연찮게 

"하늘 한번 쳐다보고/먼 산 아래 굽어 봐도/ 그믐날 길 잃은 산 승/ 명절 앞둔 도로인양/ 그저 막막한 시공.// 
아무래도 / 무거운 것 버려두고/ 걸리는 것 띄워,/ 매달린 땀 방울 마저/ 바람에 날려 보낸 빈손.// 
허전한 내 청춘의 자리/ 호젓이 날아들어/ 떠나버린 새 한 마리."라고 빈손을 노래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공수래 공수거"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자신과의 투쟁”등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과의 투쟁”이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22살 되던 해부터 인연을 맺어 하루에 2갑 이상씩을 태우던 담배를 2009. 9. 16. 자로 과감하게 버렸는데, 그 일만도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불요불급한 것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필요하나 불급한 것들에 대하여 서서히 버려가는 일을 시작하려는데 잘 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이를 실천하는 행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을 할 수 없기에 조금씩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가진 것을 버린 다음 그 마음이 얼마나 가벼울지는 아직은 모르는 미지의 세계이고, 버리고 가는 빈손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는 그 저 상상만 해보다가,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될 날이 정말로 눈앞에 닥칠 수도 있을지 가슴이 떨려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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