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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의 천렵
  • 기사등록 2011-01-10 15:06:35
  • 수정 2014-11-25 0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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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박영동]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모든 문서와 시내의 안내 표지판의 일자와 달력 등에는 어김없이 1900년대로 표기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00년대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세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신문이나 방송 또는 매스컴에는 새로운 천년의 영문을 한글화한 “밀레니엄”이라는 단어가 고개만 돌리면 시야를 점령하여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천년의 세월이 또다시 흘러가기 전에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날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겠다고 동해안으로 앞 다투어 달려들 가고, 경포대 해수욕장등 전국의 일출 장소를 서성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매일같이 낱낱이 담아 방영하곤 하였습니다.

무상한 세월의 흐름은 도도하고도 멈추는 것을 몰라 초침으로부터 펼쳐지던 분침과 시침을 쉴 사이 없도록 돌리고 돌리더니 바야흐로 새로운 천년을 몇 시간 남겨둔 시점은 기대감을 넘어선 긴장감마저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1999. 12. 31일의 밤은 초저녁부터 다가올 천년을 맞이하는 감격에 겨워 온천지가 들떠 있었을 뿐 아니라 방송에서는 2000. 1. 1. 00:00시를 기하여 제야의 종소리를 울리는 현장과 시내 중요한 장소마다 축제의 한마당을 벌려 놓고 전 세계와 온 국민의 시선을 한곳에 모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아무나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인연이 없으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사실은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숙직 근무에 당첨이 되어 남들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며 맞이하는 새로운 천년의 아침을 고요히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과장법을 스스럼없이 구사하는 중국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장장 2천년에 걸친 숙직 근무를 하였던 것입니다.

8세기경 중국의 유명한 시인 유종원 선생님께서 후세에 남겨준 시 한편 중에 강설(江雪)이라는 제하의 글을 음미하여보면, 그 내용이 참으로 가슴을 후비는 듯하고 한편으로는 의문이 가면서도 진한 감동이 우러나는 내용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온산에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마다 사람 자취 끊기었네/ 외로운 배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차가운 강에서 눈을 낚고 있네”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고 온통 눈으로 덮여있는 산천에 계절도 지나버린 광막한 들판에 있는 강위에 뜬 외로운 배에 인생을 거의 다 섭렵한 듯 삿갓 쓴 늙은이 딱 한분께서 차라리 잡히지 않는 물고기 대신 눈을 낚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아무런 생각을 말자 하여도 무언가 생각이 머물고, 생각을 하자니 쉬이 결론이 따르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싶고, 지나쳤다 하더라도 무언가 묻지 않고서는, 노옹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고, 설사 대답을 들었다 하였을지라도, 가슴에 품은 뜻을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것으로 보여 지고,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간 지금에도 눈감으면 아득한 노옹의 인생살이가 그저 궁금하기만 할 뿐입니다.

중학교 2학년 나이 15세가 되어가던 무렵 여름 방학을 맞아 우연하게 동네 선배를 통하여 영산강 지류에서 평생 처음으로 낚시에 입문한 이후, 오늘날까지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을 강변이나 저수지 또는 수로 등 물가에서 보내면서 은연중 쌓아온 사연들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첫 출조에서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선배를 뒤로 하고 메기 한 마리, 장어 한 마리, 붕어 다섯 마리 도합 일곱 마리를 잡은 이후로 한달 중 며칠만 거르고 낚시터에서 보냈는데, 얼굴과 손등은 아마 새까맣게 변하여 거의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그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움직임과는 달리, 산과 들에 새롭게 돋아나는 초목들과 들판의 익어가는 곡식이나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계속하여 되새김하면서 이어 갔던 상념들은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원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아마 현대식 대포법(과장법)을 동원하다 보면 세월을 낚았던 강태공의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였던 때로부터 약 3년여 세월이 무심코 흘러간 뒤, 2003. 12. 31자 새벽에 마치 무언가에 끌려 제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낚시 가방을 메고 목포 선창에서 신안군 도초면으로 향하는 철부도선에 혈혈단신으로 올라 고독한 여행길에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온 산천에 눈이 가득하게 쌓여 있는데도 또다시 눈이 내리는데 약 2시간 30여분 정도 소요되는 바닷길에서 바라보는 섬들과 소나무, 기묘한 형상을 갖춘 바위들이 눈 모자를 쓴 채 단장을 하였고, 아득히 수평선에 서있는 김발과 틈새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오리등 철새들과 어울려 그야말로 한편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로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산천을 혼자서 감상한다는 것이 아쉽고도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도초면의 선착장에 도착하여보니 눈이 길에 너무나 쌓여 차량 통행이 자유롭지 못한데도 이 단장이 소개한 윤 사장님이 차량을 가지고 마중을 나와 주었습니다.

승용차에 몸을 의지하여 도초면 이곡리 수로를 향하여 뒤뚱거리며 가는 동안 면소재지에서 차량을 멈추더니 집에 상을 차려 놓았으니 한사코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하여 사실은 아침 식사를 하였지만은 그 정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늘 점심이려니 하고 배불리 맛있게 먹었습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 수로가 전반적으로 얼어 있었는데 듬성 듬성 녹아있는 부분에 희망을 걸고 가방등 짐을 내려 낚시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넓은 들판에 바람이 들이치는데 거의 천지를 분간하기 힘들었고 바람이 등을 세게 밀면 잘못하여 수로에 빨려 들어 갈 것만 같은데도 굴하지 않고 낚시 대를 하나 둘 펴 미끼를 끼우고 수로의 수초가 무성한 여기저기에 던지기 시작 하였습니다.

평상시 덜렁거리는 성격으로 낚시터에서 항상 이야기 거리를 만들고는 하였는데, 그날도 예외 없이 장갑을 가지고 가지 않아 맨손으로 하는 낚시는 그야말로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겨울 낚시는 잠시 동안 기다렸다 소식이 없으면 힘들더라도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고 기다리다 또다시 이동하여 수로의 이쪽에서 저쪽 끝에까지 계속하여 움직이면서 차례로 공략하는데 날씨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삭풍이 으르렁 거리며 얼굴과 코를 후려치면 찢어질 듯 하고 갈잎에 부서지는 바람소리는 살을 저미는 듯 처절하게 슬픈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합창하여 우는 소리로 들리는 삭막한 그 들판에는 오로지 저 혼자일 뿐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몇 개나 되는 수로를 탐방하였는데 윤 사장님은 중간에 전화를 하여 낚시를 포기하고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음에도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았고, 붕어들 중에서도 나처럼 제 정신이 아닌 놈이 있었는지 3마리 정도를 잡았지만 방생을 하였습니다.

애초에는 3일간 낚시를 하려고 작정하였으나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는 살인적인 추위는 견딜 수가 없었고 바람마저 거세지니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여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불러 선착장으로 나와 보니 뱃길이 끊어져 돌아가는 길마저 막혀버린 것입니다.

서둘러 여관에 들어가 얼었던 몸을 녹이고 라면을 끓여 허기를 면하고 보니 텔레비전에서는 새해가 돌아온다면서 마치 3년 전에 들뜬 신년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내 뜻대로 하지 못한 일을 생각하니 섬에 갇혀 답답한 마음이 앞서면서 막막함이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차피 이 섬에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여야 할 운명이고 다른 길이 없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생각의 틀을 바꾸려고 애를 쓰다 보니, 내 것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마음이 서서히 다스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사소한 간섭이나 주변에 거추장스러운 신경을 세울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자유롭다는 생각에 한없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며 혼자 있는 시간이 참으로 즐겁고 아늑하여 기쁘고 감사하다는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여하에 따라 느낌의 정도가 이처럼 달라지는 것을 아주 짜릿하게 경험하였는데, 나중에도 그 순간이 신기하기만 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던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또다시 택시를 타고 이곡리로 가서 공략을 하고 있는데 이제야 말로 정말 무서운 바람에 파고드는 추위가 온몸을 엄습하였습니다.

엄동설한의 꼭두새벽에 광야에 혼자 서있는 내 자신이 무척 처량하다고 느껴지고 무슨 악연으로 이 들판을 서성이고 있는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를 않았습니다.

통이 틀 무렵에 동네 이장이 방송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부락민께서는 바쁘시더라도 오늘 한분도 빠짐없이 이장 댁으로 오셔서 아침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재차 알려드리겠습니다. 부락민 한분도 빠짐없이 이장 집으로 오셔서 아침 식사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온 마을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정초부터 식사를 하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고 부러울 뿐 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식사는 고기를 듬뿍 넣은 뜨끈뜨끈한 떡국에다 맛있는 반찬이 있을 것이고 혹시 나도 가면 아침을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이방인이 가면 분위기도 깨지고 낚시하는 체면에 밥까지 달라하면 좋아 할리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그냥 추위를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차 알려 드립니다 아직도 오시지 않은 부락민이 계십니다. 한시바삐 오셔서 식사를 해주셨으면 감사 하겠습니다”는 안내 방송이 또다시 우렁차게 들판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혹한인데다 “닥터지바고”에 나옴직한 눈밭에 홀로 서있는 나 자신에 대하여 귓전을 스치는 삭풍과 흩날리는 눈발 등으로 찬찬히 생각해 볼 틈은 없었지만 참으로 한심한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내 가슴에 누구도 모르고 나 자신도 모르는 한이 서려있는 것은 아닌지, 그 매듭을 풀려고 자신을 이토록 혹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언가 가슴속에서 뜨거운 느낌으로 끓어오르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내가 먼저 도초면에 들어와 있으면 나중에 박 원장과 전 사장이 같이 도초에 들어오기로 약속이 되었지만 배가 다닐 수 없는 악천후로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정오가 가까워지는 무렵 문득 박 원장이 도초행 배에 차와 함께 승선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 말만 들어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 날은 친구인 박 원장과 후배인 전 사장을 만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만족이고 어치피 안 되는 낚시에 조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2004. 1. 2일 여관에서 고단한 몸을 풀었던 새벽 모두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세수를 하고 준비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전쟁터로 향하는 전사들처럼 또다시 이곡리를 향하여 용감하게 전진을 하였습니다.

찌도 잘 보이지 않는 어스름 새벽 서둘러 여섯 대 정도의 낚시 대를 드리우고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모금 시원하게 빨았는데 눈보라 속에서도 누군가 낚시 대를 끌어가는 소리가 들려 서둘러 문제의 낚시 대를 쳐들어 보니 엄청난 힘으로 반항하는 붕어와 한바탕 씨름을 벌인 후 건져보니 그놈은 적어도 부근에서 대장 노릇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월척 붕어가 틀림없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날씨의 여명도 먼 새벽에 찌도 명확하게 보이지도 않는 순간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해의 월척붕어를 일찍이 낚은 기분은 무언가 추구하는 사람에게 어렵사리 내려주는 한순간의 포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던 광적인 돌진을 서슴치 않았던 스스로의 작은 성취감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무너져 흐르는 허무감이 앞서며 만약 내 인생의 종착역에서 살아온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갈등이 생기지나 않을지 두려움마저 생깁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낚시를 마치고 목포항으로 되돌아오는 철부도선에서 한편으로는 후련하였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꼬리를 자르지 못하여 객실에 들어서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하염없이 멀어져가는 섬들과 김발 등을 뒤로 흩어지는 파도와 함께 지나간 날의 추억들을 더듬었습니다.

신안 지도읍 선도리 저수지에서 수초위에 떨어진 준척급 붕어를 맨손으로 잡으려다 빠졌지만, 코끝에 걸린 물을 개의치 않고 손으로 더듬어 잡아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아하게 만든 일, 토요일 오후 2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연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구두 신은 채 낚시를 하다 다음 일요일 날 깜박 잊고 구두를 섬에까지 가방에 담아가지고 갔던 일, 서둘러 장비를 설치하다가 바지 가랑이가 폭발한 일, 봄날 밤낚시를 갔다가 착각하여 물 담은 논에다 낚시 대를 드리운 일, 태풍이 몰려온 밤에도 잠시 동안 날이 개는 것을 보고 출조 하였다.

소낙비에 흠뻑 젖은 것은 물론 천등번개 속에 낚시 대를 목숨 걸고 접어올렸던 일, 무심코 걸려온 자라를 살려주려다 오히려 물린 일등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은 과연 나의 인생에 있어 무슨 의미인지 만감이 교차할 뿐입니다.

2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그 시절의 여정이 평범한 것은 아니었고, 결과야 어찌되었든 추구하는 바를 위하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였던 순간이기에 이제 다시 추억해보니, 누추한 내 인생의 한 조각 이었고 상식을 벗어나는 변칙의 여정이었을지라도 지나간 세월에 미루어 나의 의식에 새로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 있어 반추의 기회로 하여 다른 사람의 가는 길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앞설 뿐입니다.

인간에게 하늘이 몫을 지어 내려준 시간동안 나로서 최선의 순간을 보냈다고 자부하였건만 뒤늦게 깨어나 살펴보면 그 의미 자체가 희석되어 버리고 이제 또 산비탈에 점을 찍어 남겨둔 봉우리 몇 개 없을지라도 어디에 나의 나머지 인생의 시간들을 쏟아야 할지 문득 망설여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에서 만 3일간의 처절한 사투를 마치고 뼈만 남은 고기와 함께 배를 정박해 놓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아마 내일은 날씨가 맑을 거야”라고 읊조리는 주인공은 어차피 우리들 모두의 가슴을 향하여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염화시중의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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