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 세상에는 상대방에 의하여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는 대립적 관계의 개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참새와 허수아비는 숙명적인 만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새는 어떻게 해서든지 농부가 애써 지키려 하는 곡식을 먹어야 그 생명을 지켜 나갈 수가 있을 것이고 허수아비는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 크게 흔들어 놀란 참새를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둘의 관계는 서로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아름다운 대립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참새와 허수아비를 보고 한 줄의 글귀를 부담 없이 토로하기도 합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을 당시에는 사람과 자동차가 자유롭게 오가야 할 대로상에서 전투경찰과 대학생들이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채 서로 간에 피를 부르는 극한투쟁을 벌이곤 하였습니다.
누가 이러한 아비규환의 지경까지 가도록 하였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대다수 건강한 시민들과 국민들의 가슴에는 매일 매일 안타까움만이 쌓여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은 소리 높여 적대세력의 방패 노릇을 하고 있는 전투경찰의 타도를 외치고 전투경찰은 대학생들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왔기 때문에 대학생 타도를 소리 높여 외칩니다.
그 문제의 대학생이 군에 입대하여 전투경찰이 되고 보니 대학시절 적대시 하였던 전투경찰이 자신인 것에 놀라고 직접 겪어보니 데모를 주도하는 학생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모두 자신에게 맞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사회에는 이토록 이념과 이익이 충돌하는 현장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성을 요구하는 소리가 있지만 자칫하면 원래의 함성을 덮어버리기도 합니다. 갈등과 반목이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가정과 나아가 나라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경우가 이따금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해질녘 어스름 골목에서 두 사람이 언성을 높여 싸우고 있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물체를 한사람은 “해”라고 우기고 한사람은 “달”이라고 합니다. 결론을 내지 못한 두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묻습니다. 나그네는 입장 난처한 현장을 벗어나기 위하여 궁색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나는 이 동네에 살지 않아 잘 모른다”
그래도 두 사람의 다툼은 끊이지 않고 어느 듯 동녘에 여명이 밝아오면 잠자던 수탉이 깨어 날개를 털어 싸우는 두 사람에게 또 다른 물음표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로 불길이 번집니다. 급기야 참다못한 어느 일방이 다른 상대방의 뺨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칩니다. 그러고서도 이제 방금 “철석” 소리는 손바닥에서 났느냐, 뺨에서 났느냐.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언제 기차가 달려올지 모르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지 않는 철로 위를 걸으면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철마는 큰 입을 벌려 그들이 펼쳐 놓은 공허한 메아리를 송두리 채 집어삼키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서도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이 있습니다. 제가 한 시간씩 기다려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도달할 수 있는 시골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중간 기착지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때 마침 노선버스가 결행을 한 것입니다. 한사람 두 사람 기다리다가 약 20여명의 사람이 같은 방향의 버스를 기다리면서 약속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줄을 서게 되었는데 저는 열 번째 쯤 줄을 서게 되었습니다.
아마 만원 버스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창문을 통하여 바라본 버스는 거의 사람으로 가득 찬 콩나물 시루였습니다. 한사람씩 버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데 문득 나만이라도 탔으면 좋겠다는 비겁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더 이상의 공간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망령이 들었는지 그만 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만 태우라는 소리가 빗발치고 그사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발을 밟았는지 비명을 지릅니다. 그 와중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은 사람이 오히려 밟힌 사람에게 고함을 지릅니다 “하필이면 내 발밑에다 발을 놓으면 나는 어디에 발을 딛느냐”
얼핏 보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극한 상황에서는 해괴한 논리가 등장합니다. 자신과의 갈등인 셈이지요.
그래도 버스는 시골길을 이리저리 돌아 잘도 갑니다.
차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런 순간에서 빨리 해방이 되기를 빌지만 다소간의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있었던 사소한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이 순간의 갈등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생각도 해보았고 반성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갈등과 반목의 순간은 해결이 되지만 고통스런 추억만은 제 각각 가슴에 남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언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
우리 사는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여도 내가 취하고자 하는 부분의 반을 쪼개어 상대방이 양보한 빈곳에 채우고 내가 양보하여 비어버린 반은 상대방의 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손해인 것 같아도 냉정하게 살펴보면 이미 양보해버린 부분에 대하여 상대방의 것으로 채웠으니 결국에는 이익인 셈입니다. 관점에 따라 괴변으로 들릴지 몰라도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손익분기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작 내 뱃속에 이기심으로 터지도록 채우고 자를 들고 냉정하게 계측을 한다 해도 더함도 덜함도 없는 딱 본전이지만 결과는 그런대로 좋습니다. 참으로 신통한 일입니다.
선조들께서 서로가 양보함으로써 이익을 누릴 수 있는 톱니바퀴를 개발 하였습니다. 양보하지 않은 상태의 밋밋한 둥근면으로는 서로가 맞지 않을 뿐더러 함께 굴러 힘을 발휘 하지도 못합니다. 양보함으로써 서로 간에 화합이 이루어지고 결과적으로는 이익을 얻게 되니 얼마나 남는 일입니까.
자신의 희생에서 출발한 수없는 톱니바퀴가 도도한 역사의 수레를 끌어 이곳에 도달하였으며 앞으로 까마득한 세월동안 끊임없이 굴러갈 것입니다.
그곳에 선조들의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실려 있고, 수레는 떠나가지만 달려간 수레 따라 언젠가 없어질 바퀴 자국이 구르는 수레의 행적을 이야기 하다 또한 무상한 세월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는 것 자체가 나 자신과 우리 모두 역사의 한편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모두의 중대한 결정에 대하여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알력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제 각각의 이익만 앞세우고 상대방의 눈물을 돌아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만 사랑할 뿐이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징조입니다. 자신이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억천만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방의 부족한 의사에도 귀 기울일 뿐 나와 주장이 다르다고 상대방의 가슴에 돌을 던져 멍울을 남기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산재하는 분쟁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직접 논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할지라도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민족의 분단 상황과 골 깊은 지역감정, 정당간의 알력, 계층 간의 불화, 종교 간의 마찰현상과 4대강의 이견 등 크고 작은 문제들로 갈등이 깊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 것입니다.
톱니바퀴의 지혜를 발휘하여 내가 반을 양보하여 다른 사람의 반을 채워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할 때 입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는 데에는 그만한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톱니바퀴에 이르지 못한다 하여도 최소한 참새와 허수아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허수아비는 참새에게 위협만 할뿐이지 공격을 할 줄 모릅니다.
참새도 허수아비의 옷을 찢거나 부리로 쪼지는 않습니다.
허수아비는 바람이 자면 자연의 순리대로 그대로 멈추어 있습니다.
그사이 참새는 한 톨의 곡식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농부의 마음속에 애초부터 한 톨의 곡식도 손해 볼 생각이 없었다면 모든 참새를 향하여 총을 난사하였을 것입니다.
사실은 총과 실탄 값이 더 비싸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입니다.
인간존중의 생각으로 가진 자가 부족한 자에게 한 톨의 곡식이라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면 참으로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역사는 발전적으로 공전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갈등과 반목 등에 대하여는 무심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성철스님 도포자락으로 서로가 의지하고 연구하는 지혜 한 조각 한 조각으로 모여 완성된 한 벌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은 바로 우리들 가슴속에 그대로 있는 것을 다만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