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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형무소를 가봐야 하는 이유 - 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
  • 기사등록 2010-10-09 10: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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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기 위해 세웠던 근대적 감옥이다. 일제는 융희 원년(1907)에 전국 최대 규모인 수용능력 500명, 넓이 560여 평의 건물을 짓고 1908년 10월 21일에 독립문 근처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에 해당하는 금계동(金鷄洞)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었다. 이 감옥은 일본인의 설계로 탁지부 건축소에서 지었는데 당시의 화폐로 약 5만 원을 들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뒤 일제는 늘어나는 항일애국인사들을 모두 투옥하기 어렵게 되자 일본의 감옥법을 도입하는 한편, 1912년에는 지금의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을 새로 지어 경성감옥이라 이르면서, 이곳을 서대문감옥으로 고쳐 불렀다. 그 후 1923년 5월에는 다시 이곳을 서대문형무소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형 또는 투옥되어 고초를 겪은 민족수난의 현장이다. 1945년 11월 서울형무소로, 1961년 12월 서울교도소로, 1967년 7월 서울구치소로 바뀌었는데, 1987년 11월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뒤 1992년 8월 15일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95년부터 서대문구에서 사적지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여 새롭게 단장하고, 1998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역사관에는 옥사 7개동과 사형장, 보안과 청사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 10, 11, 12 옥사와 사형장은 1988년 2월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24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서대문형무소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높이 둘러 있는 돌담, 굳게 닫혀있는 쇠문, 아무 표정도 없는 문파수의 얼굴,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서늘케 한다. 닫힌 쇠문의 한편, 작은 문을 열고 한 발자국만 들여 놓으면 그 곳은 벌써 사바세계를 등진 딴 세상이다.

현재 이 사회와 환경에 대하여 불같은 불평을 품고, 울분한 마음으로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이 속에 있고, 멀지 않아 교수대에 오를 비극의 주인공도 이곳에 있으리라.(중략) 현재 이 형무소에 갇혀 있는 사람의 총 수효는 1,380명인데 그 중에는 여자 죄수가 76명이 있다 한다.

제령(制令) 위반에는 여자는 한 명도 없고 남자는 30명이라 한다. - 여기서 ‘이 사회와 환경에 대하여 불같은 불평을 품고 울분한 마음으로 속절없는 세월을 사는 사람’과 ‘제령 위반자’는 독립운동가들을 일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던 애국지사의 수는 대략 5,000여 명을 넘는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항일민족운동가의 수형카드를 모아서 책으로 발간한 것이 9권이나 되는데 이 중 형무소 체험기를 남긴 사람이 거의 없다.

다만 최근에 김삼웅이 펴낸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와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등에서 형무소 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감된 민족대표들의 하루 일정은 아침 6시 기상, 9시 반 조반, 12시 점심, 오후 5시 저녁식사, 밤 9시 취침, 그리고 닷새에 한번 목욕을 한다. 또 매일 10분간 옥외운동을 실시하는데, 그나마 수감자끼리 만날 수 없도록 시간을 배정하였다. 수감 초기에는 가족 면회는 물론 사식 차입도 금지되었다.

민족대표들은 모두 채 한 평도 안 되는 비좁은 독방에 갇혀 심한 고문과 시멘트 바닥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형무소 내 기결수의 옷은 붉은 색이며 식사 배식 전에는 간수가 반드시 훈화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당연히 온갖 욕지거리였다.

식사도 콩과 보리로 뭉친 5등식 한 덩어리와 소금 국물, 무장아찌 두어 쪽이 고작이었다.

열악한 급식과 가혹한 수형생활로 애국지사 대부분이 옥살이 1년만 지나면 심한 병을 얻게 되고, 고문 후유증이 도져 반신불수가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규정상으로는 최소한의 식량 급여량이 마련되어 있으나 형무소 관리들의 착복으로 급식량이 현저히 적었다.

이 결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양한묵은 1919년 4월에 형무소로 수감되었다가 그 해 여름에 옥사하였고, 박준승은 1921년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죽었으며, 손병희도 병 보석으로 나왔지만 후유증으로 1922년 사망했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감옥 내의 다른 수형자와 연락을 취해 제2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유관순 열사도 일제의 갖은 고문으로 그만 옥중에서 사망했던 것이다.

애국선열들의 원한이 사무쳐 있는 곳, 형무소의 붉은 벽돌 하나하나에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던 애국지사들의 땀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 배어 있다.

천도교 대표단의 일원으로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묵암 이종일은 ‘삼천리강산이 모두 감옥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여기나 밖이나 똑같다’고 되뇌면서 출감하면 즉시 독립만세운동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애국충절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애국선열에게서 배울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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