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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열무김치 비빔밥, 발효음식 속에 담긴 흥 문화 - 곽경자 이학박사(곽경자 식초담다 대표, 전남도립대학 식품생명과학과 겸…
  • 기사등록 2026-05-14 08: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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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일생지계는 재어유(在於幼), 일년지계는 재어춘(在於春).” 공자의 말씀은 농부들이 삶 속에서 가장 먼저 실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부에게 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한 해 생명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어린 시절 농부의 딸로 자란 내 기억 속 부모님 역시 그랬다. 설이 지나자마자 두엄을 내고 밭을 갈며 봄 농사를 준비하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열무는 그렇게 봄의 흙 속에서 태어난다. 씨앗을 뿌리고 5~7일쯤 지나면 갈라진 땅 틈 사이로 작은 쌍떡잎이 얼굴을 내민다. 봄 햇살과 새벽이슬을 먹고 자란 열무는 한 달 남짓 지나면 가장 부드러운 맛을 품는다. 이 시기의 열무에는 비타민A와 비타민C, 풍부한 섬유질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억세지 않은 풋내가 살아 있어 김치로 담그면 봄의 향기 자체가 된다.

 

이 시기가 오면 친구의 둘째 언니이자 아버지가 최고의 일꾼으로 칭찬했던 광례언니의 열무김치이다. 광례언니는 머리에 열무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와서 마당한켠 가득 풀어놓고 열무를 다듬어 소금대신 간장으로 간을 맞추던 손놀림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속도였다. 언니는 젓갈 대신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풋내 대신 감칠맛이 감돌았다.

 

양푼에 꽁보리밥을 담고 열무김치와 보리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쓱쓱 비벼 환하게 웃으면서 “먹어봐”했다. 그 한 그릇에는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 이상의 따뜻한 온기가 그득했다. 우리 집 엄마의 열무김치도 특별했다. 확독에 마른 고추와 보리밥을 갈아 넣고 새우젓을 섞어 반쯤 절여진 열무에 붉은 양념을 입혔다.

 

갓 담근 열무김치에서는 풋내가 진하게 올라왔고, 그 김치에 찹쌀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빈 열무비빔밥은 봄철 최고의 음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약간 풋내가 남아 있는 갓 담근 열무김치를 좋아한다. 그것은 아마 부지런했던 엄마의 손맛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리쌀 고추장은 발효가 완성된 익은 김치에 어울렸다. 풋내가 가득한 갓 담근 열무김치에는 날카로운 매운맛을 품은 찹쌀고추장이 어울린다. 여기에 남해의 바닷바람과 햇살이 함께 빚어낸 자연건조 멸치를 반 줌 정도 넣어 함께 비벼 먹으면 부족한 영양소 보충을 이야기하지만 땅의 풋내와 바다의 비린내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발효는 단순히 음식을 저장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몸을 살리고 노동의 피로를 덜어주던 선조들의 생존 지혜였다. 농사일의 대부분이 허리를 굽혀 일하는 농부들에게 열무김치와 보리밥은 속을 편안하게 하는 가장 좋은 음식이었다. 새우젓과 고추장의 발효균은 위장을 편하게 하고, 참기름은 지용성 비타민의 흡수를 돕는다.

  

엎드려 일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흥을 잃지 않음은 조상들의 발효 식문화가 기여하고 있다. 경상도의 어부에게 물회가 있었다면, 전라도 농부에게는 보리밥열무김치 비빔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빔밥 한 그릇에는 우리의 끈질긴 생존법의 히스토리가 담겨있다.

 

오늘날 우리는 화려한 음식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음식은 어린 시절 양푼에 담겨 있던 보리밥열무김치 한 그릇인지도 모른다. 발효는 사람을 품는 일이다. 그리고 열무김치는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따뜻하지만 힘든 일을 기쁨으로 승화시킨 헤겔 이전의 우리 조상들의 지혜의 산물이다.

 

참고문헌

곽경자. 2026. 제철 머위, 엄마의 목소리와 쓴맛에 담긴 건강의 비밀.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4-30).

곽경자. 2026. 봄 우울증 해소 원추리나물, 독성 제거법부터 장아찌까지. 전남인터넷신문 치유농업과 음식 칼럼(2026-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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