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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성인(聖人) 공자를 모시는 사당/ 서울 문묘(文廟) - 서울역사박물관
  • 기사등록 2010-09-03 14: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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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위한 대성전이 앞에, 교육을 위한 명륜당이 뒤에 있는 구조가 특징

서울 문묘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 옆 유림회관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문묘 일원은 크게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이 중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삼문과 같은 중요 건축물은 보물 제141호로 등록되어 있고, 나머지 동재· 서재· 존경각· 양현고 등은 사적으로 되어 있다.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1년부터 1606년 사이에 거의 원래 모습대로 중건되고, 영조 때는 거의 모든 시설이 완비되었다. 고종 6년(1869)에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 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 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현재 종로구 명륜동3가 53 성균관대학교 내에 소재하고 있고, 1963년 보물 제141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종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문묘는 신라시대 때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서는 국자감(國子監) 안에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서울을 옮긴 후 유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에 두었었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유학 교육과 함께 선현의 제사를 받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었다.

문묘의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가운데 공자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그 좌우에는 유학자의 신위를 모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세워져 있다. 대성전 뒤편에는 학생들을 교육하고 과거 시험을 보던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그 좌우에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東齋)와 서재(書齋)가 있으며, 뒤에는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이 있다. 문묘의 건축물 규모와 격식은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있는 구조는 일반 향교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서울 문묘의 특징이다.
 
서울 문묘, 건축사 연구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 지녀

대성전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 · 맹자 · 안자 · 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宋朝) 6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기법을 느끼게 한다. 단청을 간소하게 하여 기둥에는 붉은 칠, 공포에는 녹청 칠을 하였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원래 이 곳에는 공자의 70제자와 우리나라 및 중국의 제현 112위를 제사하였으나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나머지 94인의 위패는 땅에 묻었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조 39년(1606)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중당과 양옆에 있는 익실(翼室)로 구분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맞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 공간으로 성균관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에 아름드리 큼지막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 59호이다. 수령은 500년으로 중종 14년(1519)에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었다고 한다.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가려주는 듬직한 체구의 나무는 수령만큼이나 문묘의 역사성과 전통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성균관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되자 새로 개편하여 3년제의 경학과를 설치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성균관은 경학원으로 고쳐져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 능을 잃고 문묘의 제사와 유학기관의 재산 관리만을 담당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 있는 곳이다.

문묘를 찾아가 보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명륜당은 일반에 공개되어 있는데 비해 대성전 구역은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대성전은 아쉬운 대로 문틈 사이로 보는 것으로 하고 명륜당으로 가보니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동재와 서재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옛날 밤을 세워가며 경전을 공부하며 면학에 정진하였을 성균관 유생들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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