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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에서 있었던 사연
  • 기사등록 2023-01-25 1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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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도 이 무렵 쯤 폭설이 내려 온 세상을 덮어 세상 만물이 제 각각의 색깔을 잃고 백색으로 물들여진 들판과 산을 지나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나름대로 힘들었던 과정을 격어 당도한 곳은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에 자리한 미륵사였다.


내 나이 27세에 날씨도 좋지 않은 시간에 굳이 사찰을 찾은 것은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장래에 대한 희망이 막연한 상황에서 혹시라도 고단한 내 영혼이나마 잠시 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무작정 발길을 재촉하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사찰을 찾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쇠락한 기색이 역력하여 화전민이 살았던 듯 보이는 건물과 왜소한 법당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고, 흔히 사찰에 들어서면 반겨주었던 가냘픈 풍경소리도 없는 그야말로 조그만 암자였는데, 대 창살에 창호지를 바른 문을 향해 “계십니까”를 연발하고 나니 문이 열리면서 턱에 수염이 가득하고 눈썹이 시커멓고 유난히 눈동자가 반짝이는 삼십대 후반의 처사가 나타났다.

내가 찾아온 이유를 두서없이 설명하고 있는데 우선은 날씨가 추우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허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서니 오십대 초반의 눈매가 깨끗하고 피부가 고운 보살님이 아랫목에 앉아서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계셨는데 방으로 들어가 한가운데 선자세로 두발을 모두고 합장한 채로 공손히 예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는 유난히 바람소리가 으르렁 거렸으나 방안에는 잠간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마음을 가다듬고 보살님께 내가 산사를 찾은 연유를 설명하고, 일년여 쯤 고단한 신세를 의탁하였으면 한다고 하였더니 보살님이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한참을 쳐다보시더니 처사님과 한방을 써야 하고 반찬은 일체 마늘이 들어가지 않아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승낙을 해주시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간단한 짐을 챙겨 오겠다고 말씀드린 후 힘들게 지나왔던 흔적들을 되새기며 산비탈을 되돌아 하산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미처 보지 못하였던 눈으로 덮인 산야와 설 송이 어우러진 적막한 나무 숲속, 날개를 팔랑거리며 지저귀는 새들을 보니 정말 이곳에서 내 인생의 방향을 잡아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하여 시작한 산사에서의 생활은 이후로 약 7개월간 계속 되었다.

식사시간 등을 지내면서 이 절간의 주지격인 보살님의 인생이야기를 모자이크 형식으로 들었는데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곳에서 만난 처사님도 내 친구의 집안 형이고 군에 입대하기 전 내가 22살 이었을 당시 여름밤 오후 여덟시쯤 마음에 순간적인 상처를 입고 격정을 스스로 달래면서 영암에 있는 월출산 큰골 입구에서 불도 없이 출발하여 밤 열한시 삼십분 경에 가까스로 도착을 한, 구정봉 밑에 있었던 용암사에서 만났던 적이 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때 어둠속에서 본 처사의 모습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주지 스님은 보이지를 않고 그토록 고생하여 도착한 나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 미안하여 그냥 먹었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한마디로 젊은 사람은 산에 있으면 안 된다고 호되게 책망을 하고 하루 밤을 자고 곧바로 산을 내려가라고 하산명령을 내려 아침이 밝아오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젊은 날 두 번 찾아간 사찰에서 공교롭게도 두 번 다 만난 처사님과의 인연도 그렇지만 나도 하필이면 어려운 시간만 골라 사찰에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사가 산이 아니면 살수 없게 된 깊은 사연은 끝내 알 수가 없었지만 보살님의 사연은 생활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나 둘씩 알게 되었다.

보살님은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았던 젊은 시절에 일찍이 남편을 사별하고 한복 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우고 온갖 고생을 다한 연후에 광주에서 상당히 크고도 이름 있었던 한복집을 운영하면서 그런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980년도 광주에 몰아 쳤던 사변으로 인하여 그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전 재산과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잃고 기구한 운명을 붙잡고 마지막 안식처로 이 절간을 찾은 것이었다.

보살님은 머리를 깍고 승려의 수업을 하는 과정에서 새벽이면 얼음을 깨고 찬물로 목욕을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 봉양하고 끊이지 않는 불공으로 이마에는 김이 나도록 승려수업을 열심히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보살님이 드리는 공덕에 힘입어 서서히 산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 인생의 바다에 떠도는 한척의 조각배처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가 세지면 5일 장터에 정착한 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있었는데,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보살님을 통하여 들은 바에 의하면 한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일진광풍에 못 이겨 인생이 절단 나고 아들 두 놈과 같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다.

술이 취하면 울고 깨면 또 울고, 울다 지치면 소리 높여 노래도 부르고(보통 실력이 아니었다고 함), 알지도 못하는 남정네가 술을 따르면 좋다고 마시는 동안 아들 두 놈은 동네 사람이 가져다 주는 밥이 아니면 굶은 채로 찬방에서 잠을 청하는 일이 많아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하여 사람의 형상이 온전하지 못할 무렵
보살님이 소식을 듣고 기구한 여인의 동의하에 아홉 살 먹은 큰놈을 절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 아이는 성장상태가 불량하여 그야말로 2-3살 어린 애들보다 덩치가 적었는데 이름은 “성남”이었고 보살님의 제자가 되어 행자승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조용한 절간에서도 멈추어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지 않는 변함이 있었는데, 성남이의 빈약하던 가슴과 장딴지에도 서서히 살이 붙어가고 있었다.

나로서는 한편으로 흡족하면서도 이 거친 세상에 외롭고도 외로운 성남이가 살아가는 길은 오로지 강철 같은 체력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눈물로 울어대는 성남이 에게 보다 많은 시간동안 철봉대에 매달려 있도록 강압을 하였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 안정을 찾은 성남이 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 아닌지, 몇 개월이 지난 후 혹시 성남이가 절간을 떠나가야 했던 이유가 되지 않았는지, 평생 동안 따라다니는 의문과 함께 마음 아픈 사연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해 겨울은 덧없이 흘러가고 나의 가슴속에는 보살님이 새벽마다 아침을 깨워 드리는 불공소리에 의하여 나날이 깊어져가는 불심이 느껴지고 이제는 산 아래 내려가고 싶은 생각도 멀어지며 어쩌면 이 상태로 산에서 사는 게 내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산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 서서히 가슴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는데 무상한 세월이 지나가면서 산에는 새잎이 돋아나고 아카시아 향내와 밤꽃 향내가 지천으로 덮어 코를 지르더니 성하의 녹음이 우거지는 초여름에 이르렀다.

이따금 보살님께서는 광주에 볼일이 있어 나가시면 하루 또는 이틀 만에 오시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처사님과 성남이 셋이서 점심을 먹고 목적 없는 발길로 마냥 산책을 하면서 걸어오는 길에 우연히 산모퉁이를 돌아드는 버스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보살님이 방금 보았던 차에 타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면서 점차 확신인 것처럼 굳어져 가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지금도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성남이를 불러 “성남아 보살님 오신다 산 아래로 내려가 마중 나가라”고 외치자 아무것도 모르는 성남이는 전후좌우를 따지지 않고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는데, 시간이 흘러 정말 보살님의 목소리가 경내에 퍼지고 성남이는 뒤따라 걸어오며 예측한대로 보살님은 내가 방금 보았던 버스를 타고 오신 것이었다.

보살님이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우물가에서 사바세계의 티끌을 털어내려는 듯이 칫솔로 부지런히 이빨을 닦다가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어떻게 내가 이 차로 오는 줄 알았어” 라고 물으면서 알지 못할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멍하니 초점을 잃고 서 있는데 앞에 계시는 보살님의 형체가 희미해지더니 바랑을 등에 메고 훌쩍 버스위로 올라타서 자리에 앉으시는 보살님의 형상이 순간적으로 비치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무의식중에 “보살님 앉은 자리까지 맞춰 볼께요. 운전석 뒷좌석 그 다음 자리에 앉으셨지요” 라고 무심코 토했더니 이빨을 닦던 보살님이 갑자기 손을 딱 멈추더니 “창 쪽 안 쪽” 하시기에 “창 쪽이요”라고 거침없이 대답을 해버렸다. 한참을 멎은 자세로 있던 보살님이 “박 군 공부하지 말고 차라리 도를 닦지”라고 신음처럼 뱉은 것이었다.

그때 서야 제 정신이 들은 내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고 더 이상 긴말을 할 수도 없어 그냥 방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후 현실에서 보지도 않은 상황을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를 해버렸는지 부끄럽기도 하고 이해가 가지도 않아 그 다음날까지 고민을 계속하던 중 이러다가는 내 인생을 모두 산에다 심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겹치고 급기야는 점심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보살님께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하산해 버린 것이다.

그날부터 아무런 뜻도 없이 보름간 주야 장창 술을 마셨다.

친구들과 당구를 치면서 보내는 시간 중에서도 텔레비전에 비친 우리나라의 정상과 장차관들이 아세안 5개국 순방의 길을 오르는 장면을 중계하는데 또다시 며칠이 지난 뒤 벌어질 순간을 미리 토설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었고 이때의 순간만큼은 나도 왜 그랬는지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았는데, 지금도 내가 왜 산을 서둘러 내려왔는지, 계속하여 술을 마셔야 했는지를 정립하지 못하고 그저 아득
한 세월과 부질없는 인생이 마냥 흐르는 구름처럼 속절없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불현 듯 내 인생의 까마득한 장롱 속에서 먼지 털어 펼친 책장을 보고 뜻 없는 허전함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무슨 조화로 보아야 할까.

만약에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고 깊은 사색에 잠겼더라면 그때로부터 무심하게 이어진 나의 인생은 어떠한 방향으로 펼쳐졌을까?

지금은 도로 사정으로 다른 곳에 이사를 가고 없는 우리 집 뒤켠에 있었던 적 목련이 해마다 탐스런 꽃을 피웠음에도, 때를 놓쳐 꽃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한해에 두 번 피기를 기원도 해보는데, 부질없는 바램 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륵사에서 있었던 까마득한 날들의 아득한 사연들을 들춰내어 창공을 가르는 새를 향하여 손짓하거나, 눈으로 덮여 버린 광대한 산야에서, 누군가의 이름들을 목 메이게 불러놓고 쉬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혹여나 주인을 찾지 못한 포효들이 건너편 산곡에 얼어붙었다 눈 녹은 날 아지랑이에 실려 은연중 되돌아 올지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정 호승 님은 “ 운주사의 와불 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아 놓고/ 먼데서 바람 불어/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고 노래하셨는데, 미륵사의 석불님을 뵙고서 더구나 수십년의 세월이 까마득하게 흘러가 버렸음에도, 누군가를 향하여 미치도록 그리워하지도 못하거니와 누구의 가슴에 풍경을 달아 볼 수도 없는 스스로의 처지가 그저 안타깝게만 느껴질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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