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칠흑 같은 어둠과 하늘에서 내려앉은 무색 무미, 무취의 망망한 대지를 이성의 칼로 냉철하게 둘로 갈라놓은 듯 조화를 보면 문득 절대자의 오묘한 숨결이 가슴을 파고들며, 안식을 향한 메시지가 순간 심금을 울려 대자연의 경건함에 몰입해 가기도 합니다.
누군가 부르지도 유혹하지도 않았건만 안락한 현실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불붙는 정열이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하여 무심코 눈밭의 첫머리에 나서보지만 순백의 현란함을 차마 딛지 못하고 때 아닌 망부석으로 현출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산대사께서는 “눈 덮인 들판 길을 걸어 갈 때, 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남긴 나의 발자취가, 마침내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지니” 라고 설파 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로지 하나의 빛으로 채색된 들판에 혼자의 몸으로 마주하여 걸어가는 동안에라도 얼마나 마음을 강단지게 다스려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교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초중등시절부터 사춘기를 거쳐 가면서 수시로 맞이한 눈밭에는 잠 못 이루는 번민과 갈등으로, 뼈 속을 파고드는 추위와 싸우면서 강가의 방황을 거듭하다가 인고의 순간을 뛰어 넘는 가슴 벅찬 아침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길고 긴 여정의 끝자락에 지친 발걸음으로 강물에 피어나던 자욱한 물안개는 나머지 살아갈 날들의 희망으로 비추어 보이고, 강물을 갈라내듯 쏟아지는 장대한 햇발들은 이세상의 신기루로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2003. 1. 3.경 백설이 포근하게 내려앉은 꼭두새벽으로 기억을 하는데 인간이 조성한 길들은 모두가 흔적이 없고 오로지 나 혼자만이 스스로의 갈 길을 재촉하여 나아가는 동안 문득 떠오르는 환상에 미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동안 뼈저리게 살아온 것도 별로 없거니와 인생의 커다란 우여곡절도 별로 없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지만 육체는 땅에 있으되 생각의 나래는 마냥 하늘로 날아올라 지나온 날에 대한 반추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염려로 백야에 길을 잃어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백설이 장관이고 마음에 족함이 있으면,
설사 되돌아 갈 길이 멀다손 치더라도,
발길 멈추고 망설이는 흔들림,
또한 없어야 할 것이다.
왔으면 가고 갔으면 오는 것은,
앞선 계절에 좇아 따르는,
사계절이 오는 것과 같고,
언 땅 녹이는 봄바람에,
땅을 뚫는 새싹의 이치와 같으니,
돌고 도는 세상사에 나를 맡겨,
무심으로 돌아가는 수레바퀴라."
철쭉꽃에 맺힌 두견새의 핏물과도 같이 비탄의 울음 머금은 푸념 한마디를 뜨거운 불덩이와 같이 각혈하여 토로 하였습니다.
혹자는 사람의 일생이 제 각각의 백지에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아마 눈 덮인 들판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눈 길이 나름대로의 인생역정을 드러 내놓은 축소판 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깊은 산 드렁 칡 얽혀, 내내 뒤척이는 새벽. 선잠 떨쳐 무심코 서면, 산 그림자 얼기설기 누운, 가뭇없는 하늘 언저리엔, 날선 채 번득이는 초승달.”
“길물을 인적 없어, 갈 곳 몰라 망설이면, 적막한 들판 너머, 조는 듯 깜박이는 가로등. 때마침 솔잎 털어 지나, 가슴 뚫는 청량한 바람.”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에, 마냥 기다리다 바위가 된, 잊혔던 전설 문득 깨워, 한 줄로 선 훼치는 소리. 지축 흔들어 펼치면, 은근한 하늘마저 열리고”
“은둔의 아침”
“연인으로 다가서다.”
우리 사는 세상이 한때는 드렁 칡이 얽혀있는 것처럼 뒤죽박죽으로 어지럽다 느껴지기도 할 것이지만 어느 한순간 하늘이 삼라만상을 백설로 덮어 은은한 자태를 내보이면 궂은일들은 덮어져 모조리 사라지고 한편으론 좋은 일들만이 마주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백설의 장관으로 몸과 마음의 티끌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대자연의 맑고도 아름다운 이념들을 하나로 모아 희망찬 장래를 꿈꾸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겨울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아스라이 펼쳐진 눈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엮어가는 한발 한발 짝마다 정성을 다하여 아름다운 추억들을 쌓아간다면 참으로 행복한 미래가 은둔의 여명으로 도래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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