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코카사스 산맥에서 살아가는 일명 ‘코카사스의 새’는 언제나 집이 없습니다.
거친 바람이 몰아치는 산록에서 길고 긴 밤을 지새우면서 내일이면 반드시 집을 짓겠다고 이를 악물고 다짐을 하는데 막상 아침이 오면 그동안의 고초로 파김치가 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코카사스의 새에게 단 하룻밤이라도 따뜻한 날이 있었다면 그동안의 집념으로 반드시 집을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밤새내 눈썹이 떨리도록 보금자리에 대한 애착을 보였던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순간의 생존이 우선은 절실하여 낮에는 무작정 잠을 자고 보는 것입니다.
빈곤의 처절한 악순환에 의하여 코카사스의 산맥에서 생을 영위하는 가엾은 새는 언제까지나 집이 없다가 그런대로 한 세상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에서도 지난 금융대란 이후 스스로의 존재감이나 자생력을 잃어버린 채 정착지가 없이 떠돌면서 동처식서처숙(동쪽에서 먹고, 서쪽에서 잠)의 고달픈 삶을 꾸리는 노숙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제규모로 지상천국이라고 불리며 고도의 문화적인 향연을 마음껏 누리는 미국 같은 사회의 뒤안길에서도 거리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당한 충격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자본과 재화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약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서민들의 삶이 알게 모르게 무너져 가면서 몰락한 대중들이 우후죽순으로 발생하였던 부작용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부모의 은덕이나 행운, 아니면 열심히 노력한 결과 다행히 살집을 마련한 사람이나 새에게는 코카사스의 새만큼 절실한 논리가 덜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도 변변한 보금자리 하나 갖추지 못한 코카사스의 새에게 경멸의 야유를 보낼 수도 있지만 잠시 생각의 틀을 바꾸어 생각하면 그 새의 운명이 얼마나 처절하였는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코카사스의 새로서는 지난밤에 살아남아 아침을 맞이한 것만도 천만 다행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가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논리로는 아무리 힘들다 하여도 크던 적든지 간에 열심히 노력하여 제 살집을 짓거나 거처만큼은 스스로 마련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만약 5미터 이내에서 타고 있는 산불을 끌 능력밖에 없는데도 이미 산불은 10미터 밖에서 활활 타고 있으면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그 불길을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저 정도의 불도 끌 능력이 없느냐고 책망할 수도 있지만 능력의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계속하여 불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산에 사는 비둘기도 집이 있고, 하늘에 나는 까마귀도 쉴 곳이 있고, 숲에 사는 벌레도 집이 있는데, 우리는 어째서 집이 없느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술이 취한 상태에서 한 서린 손바닥으로 땅을 쳐대면서 눈물로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요사이는 서민들 사이에 전세나 사글세의 대란이라는 신조어가 생겨 나면서 감당하기 힘든 속도로 불어나는 임대료 부담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도시에서 이삿짐을 싸들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변두리로 내몰리는 가장들의 어깨가 무겁기만 합니다.
스스로 마련한 집의 대출금 이자를 부담하기도 힘든데다 자신의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의 애환도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깊어가며 도미노의 현상과도 같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져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봄이 되면 산과들에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덩이를 파는 소리가 온 산야에 목어처럼 울려 퍼지게 되면, 비록 누추하지만 따뜻한 군불을 마음껏 피울 수 있는 초가집에서 편안하게 봄의 생동감을 느껴보기도 하였습니다.
새와 짐승들의 보금자리는 주로 수컷이 마련을 하는데 나무의 밑둥치에서 보면 상당히 높은 곳인데도 옆에 언덕이 있어 적이 침입하기가 쉽거나, 습기가 많으면 암컷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수컷이 만들어 놓은 좋은 집으로 가버리기도 하여 모든 것이 허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인간사에 있어서는 남녀 간에 맺어 놓은 인연과 그 결과로 태어난 자식들이 있기에 작고 힘들고 불편하다 할지라도 가족은 변함없이 하나의 카테고리에서 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저산에 딱따구리는 생나무도 잘 뚫는데 우리 집에 멍충이는 뚫린 것도 못 뚫네”는 정선아리랑의 한 구절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생나무를 뚫어 보금자리를 만들 능력은 오로지 딱따구리의 것임에도 해마다 만들어 놓은 안식처를 넘보는 원앙새와 동박새, 파랑새 뿐 아니라 청설모등도 있습니다.
집을 마련하는 것도 힘든데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주인이 바뀌고 이를 다시 탈환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지키는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요사이 서민들의 가계부채가 최고점을 돌파하면서 가뜩이나 힘들게 살아가는데, 가진 자의 주택과 부동산에 전세와 사글세로 전환하여 은행이자를 크게 상회하는 무리한 요구들을 하는 바람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재산을 형성한 축재자의 세력들이 금리가 하락하는 대신에 그 부족함을 전세금의 상향이나 사글세의 인상으로 보충하려는 심리도 있거니와, 대출금의 이자를 감당하기 힘든 주택소유자의 생존의 논리와도 서로 충돌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 중에 의, 식, 주라는 삼대요소가 있는데 이중에 하나라도 불안하면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을 것인데, 가장 중요한 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경제적인 수치의 호전과는 별개로 우리가 잘사는 나라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엉망이 되 버린 주택거래 시장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해결을 할 것인가 관계 당국에서도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적절한 대책이 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예전의 주거개념이 개인적인 소유를 주로 하였던 대신에 요즈음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임대의 개념으로 전환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지금은 굳이 무리를 하여 주택을 마련하기보다는 생활의 개념으로 임대를 희망하는 수요가 크게 증가 하였기에 전세금과 사글세의 주택을 놓고 경쟁적인 관계로 임대료가 자꾸만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전의 주택정책은 서민들의 주택마련 기회를 넓히고 다른 대자본의 침투로 주택의 집약을 방지하려는 어느 정도의 제약과 함께, 중산층이 주택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의 제도를 구비하였기 때문에 너도 나도 개인소유 주택을 소유하려는 욕구로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주택의 대다수 소유자들 중 자기자본의 비율이 낮은 상태에서 부동산 가격의 상승에 다른 마진을 노리고 매입을 하였던 사람들이, 매입 당시 받은 대출금의 이자를 감당하기가 버거운 나머지 깡통주택이 되면서 서서히 그나마 가진 것도 못 지킬 정도가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도 구태의연하게 주택의 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한 부수적인 조치를 거듭하는 정책만으로는 현재의 대란을 치유할 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서구식 주택의 개념으로 전환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면 과감하게 대자본의 주택소유를 제한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고, 대기업의 잉여자금과 공공부문의 여유자본을 동원하여 어려움에 처한 서민들의 집을 사주어 생존하게끔 활로를 열어 주고, 주택임대사업자를 크게 양성하는 정책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대자본의 잉여자금들은 금리의 하락으로 인하여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투자처를 찾아 보다 안정된 수입을 누릴 수 있는 주택을 비롯한 부동산 임대사업에 맛을 들이게 될 것이며, 대규모 임대사업자들 간에 선의의 경쟁에 힘입어 서민들은 보다 싸고 질 좋은 주택을 임대하여 편안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주택경제의 논리는 수요와 공급이 은연중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조장을 하여주는 정책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생각보다 장기간으로 이어질 불황의 그늘을 탈피하는 적절한 방법은 대자본의 갈 길을 열어주어 경제에 활력이 돋아나도록 하면서 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실질적인 경제정책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에게 집이 있는 것은 극히 자연의 이법에 따르는 우주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고, 사람에게 집이 없는 것은 인위적인 규제와 편견으로 무리한 탐욕이 얼룩진 부조리가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