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영동, 등대 길을 잃다!
  • 기사등록 2013-01-11 17:15:49
기사수정
 
길은 길에 연하여 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들은 이루 그 수를 다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 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칭하고 나면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육지에 있는 산과 들과 강에는 사람이나 뭇 짐승들이 다니는 길이 있는데, 육지를 거치는 길이 다하면 이어서 바다길이 열리고 바다 길이 다하면 또다시 육지 길이 이어 집니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공전을 되풀이 하는 지상을 스치는 길이 다하면 하늘에 또다시 길이 열립니다.

새나 곤충들은 이미 하늘에 길을 열어놓고 자신들만의 길을 구축 하였는데 첨단 기술은 인간의 발걸음을 하늘로 연장시킨 것도 모자라 광대한 우주에까지 늘려 놓았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내기도 하지만 예전의 길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인위적으로 막아 무상한 세월로 덮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오거나 사나운 폭풍이 몰아치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계속하여 몸을 낮추어 가며 자신 만의 길을 냅니다. 한 방울씩 물의 정령들이 모이고 모여 장대한 물줄기를 만들고 대지를 파헤치거나 돌아가며 길을 내고 결국에는 도도한 강물을 이루기도 합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머금어 들판을 가로질러 산모퉁이 돌고 도는 영산강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고, 자신의 가슴속에 피고 지던 수많은 애환을 스스로 간직한 채, 태초에 생성된 전설로부터 현세의 저리는 아픈 추억까지도 모두 녹여 천지를 울리는 범종이 되어 묵언의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강은 백년이 가고 천년이 가도 그 물줄기를 그치지 않고 무심코 흐르건만 이 강변에 젖줄을 댄 초목과 짐승들과 인걸은 이제껏 한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뒤를 이어 날마다 새롭고 아름다운 강변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후삼국 시대 견훤과 왕건이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대 격전을 벌였던 무안군 몽탄면에 소재하는 “파군다리”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고하도처럼 지금도 옛사람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모두 사라져 버린 채 무정한 강물만이 애절한 독백으로 그 몸을 언덕에 하염없이 부딪고 있습니다.

1976년도 영산강 하구언의 공사완공으로 그나마 바다와 통하던 영산강의 물길은 인위적으로 폐쇄되는 아픔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와 함께 강은 그 생명을 잃어가기 시작하여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끊어 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영산포구의 뱃길이 끊어지고 유일하게 육지 속에 불을 밝히던 등대에는 더 이상 불을 밝힐 이유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등대는 물길을 가는 배 들의 좌표가 되어 어디로 가야 할 길인지를 알려주는 그야말로 밤의 파수꾼임에도 등대가 갈 바를 잃었으니 물길은 영영 단절이 된 것이 틀림없었던 것입니다.

큰비가 오면 범람하는 홍수의 피해와 가물면 타들어가는 농경지에 대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상류에는 4개의 댐을 건설하여 물을 애초부터 가두고 하구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은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한때 치수의 대책은 효과적으로 완성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다스림에는 그 수량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기능을 위한다 할지라도 사람과 물고기들의 길만은 남겨두었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보이지 않았던 부작용이 나타나고 등대가 길을 잃고 흉물로 남아 있던 시절만큼 그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태초에 광활한 중국대륙 요임금이 다스리던 시절에 가장 큰 문제는 “홍수가 범람하여 넓은 땅을 뒤덮고, 흥건한 물결은 산을 잠기게 하고 구릉위로 오르고, 거친 기세는 하늘로 치닫는 형국”으로 물이 넘치는 것이 치국의 걸림돌이 되던 시절, 자나 깨나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던 요임금은 곤(鯀)이라는 신하에게 9년간 치수 사업을 맡겼으나 끝내 실패하였습니다.

요 임금께서 연로하여 30대의 순임금을 발탁하여 28년간 섭정하도록 명하셨는데, 마침내 그 명을 마치시자 드디어 순 임금이 왕위에 오르고 또다시 치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신하들에게 적임자를 물은즉 곤의 아들 “백우(伯禹)”를 천거하므로 “좋소 우여 그대는 물과 땅을 다스리되 힘을 다해 주시오” 하자 우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실패한 중대한 소임을 맡게 됩니다.

이후 우는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물을 다스림에 성공하였으며, 순임금이 서거하자, 치수의 공로로 명재상 “고요”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역사의 질곡을 발견하게 되는데 단군세기에 보면 “갑술 67년(기원전 2267년)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하였으니, 유주와 영주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희대 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도산의 회맹”에서 단군 2세 “부루”태자가 단제의 신하인 풍백 “팽우”가 완성한 오행치수의 이론과 선진문화를 순임금의 신하인 우에게 전수해주고 국경을 확실하게 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로부터 4천여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 우임금이 펼쳤던 치수 정책의 후유증인지는 모르지만 중국대륙은 이제 거꾸로 해마다 늘어나는 사막화를 걱정하는 형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물이 부족한 형국으로 위와 같은 장구한 시간 동안의 치수 정책을 살펴보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를 이용할 수는 있어도 결코 자연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구언의 갑문을 설치할 당시에는 완벽한 영산강의 치수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상류에 세운 4개댐 수량 조절에 의존하면서 하구언의 차단을 능동적으로 하여 보다 덜 통제된 치수 정책을 썼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신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갑론을박의 토론과 거듭되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란의 와중에서 서로 간에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데, 상대방의 잘못된 의견은 나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도록 안내하는 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고, 상대방이 세운 이정표는 나의 방종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그릇된 견해도 물길에 솟아있는 바위 턱과 같아서 일견 등대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길을 인도하는 좌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동안 수없는 세월의 부침을 이겨내고 묵묵히 흘러가던 영산강을 두고 수많은 분들이 나름대로의 이론을 설파하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죽어있는 강을 살리자는 일에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물류 수송 능력의 확대와 더불어 문화와 생태의 원활한 유통을 주장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모두 방향만 다를 뿐 공동의 목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934년 일본인들이 무안군 일로읍 구정리 앞 영산강 한복판에 세웠던 무인 등대는 불꺼진 채 그동안 고물로 남아 있었는데, 목포지방 항만청은 2009. 1. 1경 그 불을 다시 밝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어 배와 젓갈배가 도착하면 장날처럼 북적대고, 선창에는 화교들의 포목점이 즐비하게 있었던 영산포구에 외로이 자리 잡았던 육지속의 외로운 등대도 이제는 암흑의 세월을 떨쳐 일어나 불을 밝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들을 배에 싣고 2-3일간 배를 운항하여 영산포구에 다다르면 천연적으로 홍어가 발효되어 그 맛이 천하에 일품이되었다 하는데, 지금도 영산포구에는 홍어의 거리가 있고 그 얼큰한 맛을 못 잊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영산강에 삶의 끈을 이은 모든 사람들이 드디어 열리는 물길을 따라 기지개를 켜고 새로운 날의 꿈을 꾸고 도약을 하는 날이 멀지 않은 것입니다.

어떠한 연유로든지 간에 잠자던 강이 깨어 일어나면 강변에 사람들도 이제는 지난날의 아픔을 잊고 떨쳐 일어나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소모적인 갈등과 대립은 영산강의 성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날의 꿈을 열어가는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영산강변에서 등대가 길을 잃은 강줄기를 굽어보며 모가지가 길어서 슬펐던 애처로운 사슴처럼 서 있던 배움의 전당에도 2008. 11월에 새로운 날을 다짐하는 함성이 우렁차게 퍼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여의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에는 비록 뱃길은 시원하게 열리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최소한 등대에 불을 밝히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영산강변의 민초들이 모래알 같은 작은 힘일지라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고, 모든 사람들의 정성으로 모아 언덕을 이루고 산을 이룬다면 상상을 초월한 에너지가 분출되면서 역동적인 발전과 지역사회의 번영을 위한 만고에 빛나는 초석을 다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뭉쳐 있으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고, 두려움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며,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생각으로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펴고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처럼 하늘높이 떨쳐 일어나야 할 때인 것입니다.

사사로운 정리나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 결과를 논하기에 앞서 인내와 끈기, 화해와 타협,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끝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합리적인 목표를 세우고 중단 없는 전진으로 우리세대에 이루지 못할 꿈이 있다면 다음세대가 이룰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성철 스님의 도포 자락처럼 피 같은 정성을 한 땀 한 땀 모아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친다 할지라도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큰 목표를 향하여 불굴의 의지를 펼쳐 나간다면 결국에 우리의 꿈은 이루어 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002년도 월드컵 축구를 치르면서 참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할 것입니다.

7000만 온 겨레가 떠오르는 태양을 가슴에 새겨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온통 붉은 옷과 깃발을 휘두르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월드컵 1승도 올리지 못하였던 오욕의 세월을 한순간에 벗어 던지고,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달성하던 뜨겁고 황홀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열과 성을 다하여 노력을 한다면 영산강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 넘치는 생명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넓은 가슴으로 안아 삶의 희망과 풍성한 수확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 세월의 낡은 사고와 회의적인 패배주의를 버리고 우리를 짓누르던 과거의 공작물을 과감하게 제거하여 하루 속히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영산강의 정령들이 자유분방하게 깨어 일어나도록 그 여건을 조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길 잃은 등대가 참다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의 올바른 생각과 이념들이 물안개처럼 피어나고 이 땅을 촉촉하게 적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꽃처럼 피어나는 민초들의 수줍은 미소가 잔잔하게 번지는 화창한 봄날이 오기를 가슴 조여 고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jnnews.co.kr/news/view.php?idx=92054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지리산 노고단에 핀 진달래
  •  기사 이미지 보성군, 연둣빛 계단식 차밭에서 곡우 맞아 햇차 수확 ‘한창’
  •  기사 이미지 강진 백련사, 동백꽃 후두둑~
한국언론사협회 메인 왼쪽 1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