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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疾風怒濤)의 나라 (2)
  • 기사등록 2012-09-20 15: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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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국의 후손인 해모수가 기원전 239년 4월 8일 웅심 산에서 내려와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칭하고 삼조선의 옛 도읍을 모두 평정한 다음, 기원전 194년 2세 단군 모수리, 기원전 169년 3세 단군 고해사, 기원전 120년 4세 단군 고우루가 즉위하여 대를 이어 다스리다 기원전 86년에 붕어 하였다.

4세 단군 고우루 원년에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2세 단군 모수리의 동생인 고진을 발탁하여 서 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으므로 고리군을 다스리는 고구려후로 봉 하였다.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유철이 위만조선의 후손인 우거와 성기를 노략질하자, 47세 단군 고열가의 후손인 고두막한(두막루)이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제는 동명(東明)이라 하였다.(후기 북부여. 졸본부여라고도 함)


기원전 106년 단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일으키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이에 옛 번조선의 땅에서 우거의 통치를 받던 백성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방에서 호응을 하니 한나라의 병사들이 먼 곳에서 모습만 보고도 흩어지고 무너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 하(패수)를 건너 요동지방의 서안평(바이칼 호수 동쪽 내몽고 추정, 고려성)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기원전 87년 동명왕은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에게 사람을 시켜서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땅에서 옮겨 가시오’ 라고 하자 단제가 걱정 끝에 병을 얻어 기원전 86년에 붕어 하였다.

단제의 동생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니 군신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있던 중 국상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분능)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곡식이 잘되니 도읍을 정할만한 곳이다’고 하여 마침내 백성들과 이주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라 하였다.

해부루가 분능으로 이사를 가자 동명왕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나라 이름을 또다시 북부여라 하였으니 이전의 북부여를 계승한 후기의 5세 단군인 것이다.

그해 가을 8월에 서압록 하의 상류에서 한나라 군사와 여러 차례 싸웠으나 크게 이겼다.

기원전 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가섭원, 갈사)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60년 동명왕이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 천에 장사를 지냈다.

기원전 59년 태자 고무서가 졸본 천에서 6세 단군에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史例)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고 불렀다.

이때 한나라 오랑캐들이 구려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나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한편 동명왕에게 나라를 바친 해부루는 기원전 86년에 가섭원(만주 길림성 추정)에서 새로이 동부여를 세웠는데 오곡이 풍성하고 짐승들이 많아 사냥하기가 편하였다.

기원전 84년에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모아 잘 먹여주고 살 곳을 주어, 밭을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족해지고 때마다 비가 내려 땅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은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기원전 80년경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북부여의 황손으로 고구려 후 고진의 손자 고모수(본명은 불리지, 옥저후)가 유혹을 하여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간 유화부인을 왕께서는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기원전 79년 5월 5일 유화부인이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생김새가 뛰어나고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 이었다.

기원전 77년 해부루 왕이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 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이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고 기뻐하며 거두어 길러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여 태자로 책봉하였다.

유화부인은 불리지가 죽자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만주 길림성 영길현)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사는 동안 말지기로 뽑혀 임명이 되었는데 얼마 안가 관가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기원전 59년 백성들이 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며 그를 죽이려고 했다.

주몽은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남쪽으로 도망을 하여 엄리대수(분릉수)에 이르러 다리도 없고 배도 없는데 뒤에서는 군사들이 쫓아오는데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어찌하란 말인가?, 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서둘러 건너고 나니 모두가 흩어졌다.

강을 건너 졸본 천에 이르러 오가 중 계루부 족장 연타취발의 딸로온조와 비류라는 두 아들을 둔 소서노와 결혼하였다.

연타취발은 남북 갈사국(동부여의 분리)을 상대로 엄청난 재물을 축적하여 거만금에 이르렀는데 주몽을 은밀하게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 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 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이 북부여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치고 도읍을 눌현으로 옮길 때에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공을 세워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졸본부여의 6세 단군 고무서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기원전 58년에 단제께서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그해 겨울 10월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유언에 따라 주몽이 대통을 이었으며, 동명왕의 나라인 구려를 받들어 고구려라 하였다.

한편 동부여(가섭원부여)의 계유38년인 기원전 48년에 해부루 왕이 죽고 이듬해 47년에 2세 금와가 즉위 하였다.

그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돌아가시자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황태후의 예로써 산 같은 능을 만들어 장례를 치르고 곁에는 묘사를 짓게 하였다.

기원전 7년 금와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3세 단군에 즉위 하였다.

기원전 6년에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자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그해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 성을 침략하였으나 쿤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 퇴각하였다.
서기 13년 또다시 고구려를 침략 하였으나 학반령 밑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서기 22년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 모아서 침범해오니 대소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난 왕의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고구려의 대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 있다가 살해 하였다.

동부여군은 왕이 시해를 당하였어도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고구려 군을 포위하였는데 7일간 안개가 끼는 바람에 고구려 열제는 밤에 사잇길을 따라 도망을 하였다.

서기 22년 4월 대소왕의 동생은 따르는 수백인과 함께 길을 떠나 압록곡에 이르렀는데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백성들을 취하여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여 나라를 세워 왕을 칭하여 나라 이름은 갈사였다.

태조 무열제 16년 8월에 3세 도두왕은 고구려가 날로 강대하여 지는 것을 보고 47년 만에 나라를 들어 항복하자 고구려는 흔춘(만주 길림성 연길현)의 동쪽을 식읍으로 삼게 하고 동부여 후에 봉 하였다.

고구려의 팽창에 의하여 옛 부여의 잔존 세력들은 남하하여 이미 터를 잡은 백제와 합류하여 강성하였는데 남부여라고도 한다.

남부여의 왕족들은 대를 이어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 들였는데 바다를 건너 열도부여의 원조가 되었으며, 이들의 유대관계는 수백 년을 거쳐 끈끈하게 유지되었다.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이 비록 기원전 58년이라 하지만, 기원전 239년 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이후, 기원전 108년 동명왕의 후기 북부여로 계승이 되었으며, 6세 단군 고무서로부터 왕위를 이어 받아 부여건국의 주축이 되었던 고리국에서 해모수로부터 고구려 천년의 역사는 은연중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는 멸망한 서기 668년 이전까지 요하 동쪽의 땅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내몽고 지역에 있던 고려성(서안평, 고리국의 옛 땅)까지도 그 영역에 두고 광활한 벌판을 질풍노도처럼 달려온 상고시대 우리 조상들의 웅대한 기상인 것이다.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하였던 몽골의 신화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징기스칸의 탄생설화의 이면에는 고주몽의 핏줄인 고리족으로 부터 분파된 후손임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우랄알타이 산맥을 시원으로 하여 번창한 몽골, 흉노(훈족), 스키타이, 돌궐, 말갈, 숙신, 예맥, 구이, 구려, 삼묘족, 고조선, 부여, 거란, 선비(여진), 왜(물길) 등이 원래는 한 뿌리였으며,

세계사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흩어진 조상들의 찬란한 역사 한조각일지라도 애써 차근차근 되찾아 새로운 세계질서의 가슴 벅찬 태동을 꿈꾸어 보는 대변환의 시기가 면전에 도래한 것이다.

휴애거사범장북부여기 상,하. 가섭원부여기, 이맥고구려본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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