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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疾風怒濤)의 나라 (1)
  • 기사등록 2012-07-18 13: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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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기원전 2707년에 14세 자오지 한웅에 올라 기원전 2598년까지 무려 109년에 걸쳐 제위 하였으며 천수 151세를 풍미하신 일명 치우천황이 다스리던 나라의 이름은 구려(句麗)였다.

나라의 관경은 오늘날 중국의 호북, 호남, 강서지역을 아우르고 살았는데 백성들은 묘족이었으며 유묘, 삼묘라고도 부르고,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삼한을 통합하는 중에도 독자적인 체제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오늘날에도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존속하고 있다.

기원전 1236년에도 남국(남이)의 왕 금달과 청구의 임금, 몽고리의 병력과 구려의 임금이 연합하여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희대의 땅을 평정 하였다.

몽고의 할힌골 강가에 고리국이 있었는데 그 종족은 브리야트 인으로 몽고족의 일파였는데 지금도 ‘코리족’이라 부르기도 하면서 고려, 코리아의 어원이 되었다.

기원전 239년에 고리국의 웅심산에서 23세의 나이로 도를 깨우치고 신과 같은 눈빛으로 사람을 꿰뚫어 바라보며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북부여”라 하였는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호라 칭 하였다.

(동호는 흉노의 모돌 선우에게 패한 뒤 둘로 나뉘어 일부는 동오산으로 들어가 동오족이 되고, 일부는 선비산으로 들어가 남선비가 되었는데, 남선비(여진)는 훗날 금나라의 모태가 되었다.)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쌓고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용광의 칼을 차시고 다섯 마리의 용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즉위 하였다.

기원전 232년에 47세 단군 고열가의 입산수도로 인하여 오가에 의하여 유지되던 막 조선에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의 정치를 철폐 하였다.

만백성의 추대를 받아 같은 해 1세 단군에 즉위 하면서 스스로를 천왕랑이라 칭하였다.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229년에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중국의 요령성 추정)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동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 하고 돌아갔다.

기원전 221년에 기비가 죽으니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고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이맥의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편에는 기비의 즉위 년도를 기원전 172년으로 표기. 번한세가에도 해모수와 기비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는데 명령을 받들어 보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역사적사실과 기재년도에 있어 저자의 오기로 보여짐.)

연나라의 장수 진개는 기원전 339년에 번 조선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그 지모가 탁월하여 28년이 지난 후 번조선의 신임을 받아 인질을 면하여 주었는데, 기원전 311년경부터 기원전 270년까지 무려 40여년에 걸쳐 나라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어 서쪽 변두리 땅을 계속 침범을 하여 약 2천 여리를 빼앗아 만 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기원전 220년에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7월에 336간의 새로운 궁궐을 지어 천안궁이라 하였다.

기원전 219년에 창해역사(한 무제가 동부여(해부루의 가섭원부여)를 멸망시킬 것을 예정하여 봉하기로 한 이름. 북부여기의 저자인 휴애거사 범장도 중국 측 사료를 기본으로 저술한 흔적이 있음. 실제로는 동부여역사로 표기하여야 맞는데도 시기적으로 20여년 뒤 가상의 지명을 표기한 오류나 중국 측의 곡필로 고대사의 혼란이 따름.) 여홍성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시황 ‘정’을 박랑사에서 120근이나 되는 철퇴로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여 부차를 박살내었다. (이로 인하여 진시황에 대항하여 훗날 연, 제, 조, 한(漢)등의 반발 세력을 불러일으켜 진나라의 붕괴를 앞당기는 희대의 사건이 되었음.)

기원전 1833년 8월에 12세 단군 아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시면서 구려하(남만주의 남쪽을 흐르던 강, 난하)의 남쪽에 이르러 순수관경의 비석에 역대 제왕들의 이름을 새겨 두었는데, 뒷날 동부여의 역사 여홍성은 약 1,600여년이 지나간 이 비석을 보고 시 한수를 남겼다.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 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라는 구절은 여홍성의 인물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230여 년 전으로 까마득한 세월이 무심하기만 하다.

기원전 209년 진승(진나라 말기 농민반란의 주동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워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도망하여 번 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많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면서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

기원전 202년에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오늘의 난하(灤河)(구려하, 고구려 멸망후 요하)다.

기원전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단제는 허락치 않으시고 병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번조선 왕이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해 겨울 단제께서 붕어 하시자 웅심산 기슭에 장사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기원전 194년에 2세 단군에 즉위 하였다.

기원전 193년에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하남성 평양현)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하였다.

기원전 192년에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구제를 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기원전 170년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 하였다.

기원전 169년에 낙랑 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낙랑왕 최숭은 기원전 195년에도 해모수에게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왕검성에 이른 적이 있음.)

기원전 146년에 번조선의 왕 기준은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잃고 이후 번 조선은 위만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1237년 23세 단군 아흘의 숙부이자 22세 단군 색블루의 동생 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 명하였는데, 이후 고죽군이라 하다가 진나라 때는 북평군으로, 위나라 때는 노령군으로, 북연때는 평주와 낙랑군이라 하고, 북위 때는 북평군이라 하고, 명나라 때는 영평부라 하였는데, 지금의 위치는 난하(패수)의 동쪽 40리 근방이고 서쪽으로 약 550리 정도 떨어진 곳에 북경이 있었다.

제환공의 명재상 관중이 ‘영평부“라는 시를 남겼는데, ”노룡성 안에 날 저물자/ 우부산 꼭대기에 뭉게구름 모이나/ 모두들 말하기를, 오랑캐 와서 말 먹이며/ 한나라의 이장군(이릉 추정)이 누구냐고 말한다.“는 구절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지명의 변화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은연중 알 수 있다.

기원전 128년에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기원전 121년에 일군국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 하였다. 9월에 단제 붕어 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 하였다.

기원전 120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위만조선의 잔류, 우거 이후에는 성기)를 토벌 하였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 압록(큰 강의 뜻, 지금의 압록강은 아님, 난하로 추정)을 수비토록 하였는데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 후(高句麗候)로 삼았다.

기원전 118년에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단제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기원전 117년에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이 결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기원전 115년에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기원전 114년에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에 두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기원전 108년에 우거가 토착민(번조선의 백성들)들의 강력한 반발로 기강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서 한나라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 하고 사방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침략을 하므로,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홰청의 참, 평주(낙랑)의 협, 추저의 음, 날양의 최가 일어나 한의 군대와 처절한 투쟁을 하였으며, 특히 최는 우거를 참살하였는데, 속칭 한사군 전쟁이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한사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며(일제의 식민사관이 날조), 한 무제는 당시 이 전쟁에 추가로 참여를 하였던 육군의 책임자 순체와 해군의 책임자 양복과 사신으로 파견을 하였던 위산과 공손수 네 사람에 대하여 전쟁이 끝난 후, 능지처참의 형인 기시(네 마리의 말에 사지를 묶어 찢는 잔인한 형벌)로 다스렸다는 것은 한나라가 뼈아픈 패배를 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 하는 것이다.

기원전 86년에 단제께서는 도읍을 내달라는 동명왕의 위협에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시고, 동생인 해부루가 가섭원의 분능으로 옮겨가 즉위하였는데 “동부여”라 하였다.
 
*참조: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 박영규의 고구려 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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