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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기미 3.1 독립만세운동의 고찰 - 해남항일독립운동 희생자 추모사업 위원회
  • 기사등록 2011-02-23 21: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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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뒤에 92주년 3․1절을 맞게 된다. 일제치하였던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많은 선열들이 전국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국권회복과 일본제국주의의 총칼에 맞서 소중한 자기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궐기하였다.

지강 양한묵선생은 옥천면 영신리 출신으로 이준 열사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하고 1902년 손병희, 오세창선생 등과 일본 동경에서 만나 통학에 입교한 후 서울에 천도교 중앙종부를 결성하여 법무사, 좌도부사 등으로 활약하다가 3․1 독립운동때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셨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0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정암 송봉해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펼치신 분이었다. 해남읍에서 고려의원을 개업하고 인술을 베풀며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하셨다. 이승만, 박정희씨 등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절대로 독립운동유공자 포상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시다가 1971년 별세하였고 이후 28년만인 1999년 김대중대통령 재임시에 비로소 유가족이 훈장과 포상을 수상하였다.

1919년 4월 6일 해남장날을 틈타 해남보통학교 학생인 김규수 외 53명이 주동이 되어 1,000여명씩 다섯 차례나 궐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학생들과 청년들은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돈을 모아서 광목과 종이, 물감을 구하여 소․중․대형 태극기 800여개를 만들어서 5월 1일까지 다섯차례나 해남장터에서 격렬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궐기하였다. 이 밖에도 삼산, 화산, 송지, 북평, 옥천, 마산, 산이면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 되었다. 일본경찰은 주모자 54명을 체포하여 조선총독부 목포지원에서 태형 80대 ~ 징역 1년까지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4월 24일 문내면 우수영 장날에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일본인들의 방자한 횡포에 남달리 의분심을 가지고 있던 우수영보통학교 학생 윤인섭 등 10여명의 학생들과 청년 이상순 등 모두 20여명이 나라 잃은 설움을 느끼고 우수영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켜보자고 제의하자 모두 연명으로 무인을 찍고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매 장날에서 500여명씩 네차례나 궐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21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 1년씩 옥고를 치뤘다.

기미 3․1 독립운동 92주년을 앞두고 전국의 어느 고장보다도 활발하고 줄기찬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우리 고향 해남에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였던 희생자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잊지 말고 순국선열들의 명복을 기원하고 숭고한 자기 희생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자기 가족들과 집안 식구들의 보복과 후환이 두려워서 순국하거나 투옥될 때 가명을 사용함으로써 호족과 족보의 이름이 맞지 않아서 지금도 50여분의 독립운동 주동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지 못하여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끝으로 오는 7월 8일 14:00 해남 예술회관에서 해남항일독립운동 희생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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