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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 노백린장군 85주기 추모식 - 21일(금)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영화관에서
  • 기사등록 2011-01-20 18: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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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계원 노백린장군 85주기 추모식」이 21일(금)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영화관에서 이희범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승병일 광복회 부회장, 독립운동관련 단체대표와 광복회원, 친지·종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유족 주관으로 열린다.

이 날 추모식은 노규동 종친회사무총장의 약력보고와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광복회장의 추모사에 이어 헌화, 분향 순으로 개최된다.

노백린 장군(1875∼1926)은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한문을 배우다가 1895년에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 1899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에 귀국하여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고 한국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자 안창호, 이갑, 이동녕, 신채호 선생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고향인 송화에 민립학교 광무학당을 설립하는 등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용만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구국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무부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으며, 그 후 제2대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었고, 미국에 머물면서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린(金鍾麟)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여 1923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토록 하였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서리에,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며, 1925년 3월에 박은식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교통 겸 군무총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던 장군은 상해에서 병을 얻어 1926년 1월 22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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