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배영래 기자]나주시 성북동에 있는 보물 제49호 ‘나주 동점문(東漸門) 밖 석당간(石幢竿)’의 영험함에서 유래된 ‘나주 짐대 문화’가 존재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은 높이 11m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의미하는 당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런데 1530년에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나주목 고적조에는 “석장(石墻)은 동문 밖에 있는데, 처음 주(州)를 설치할 때 술자(術者)가 세웠으며 이는 행주(行舟)의 형세를 표시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 간행된 읍지(邑誌)나 규장각 소장 나주목 지도에는 모두 석장(石墻)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처럼 당간이 아니라 석장이냐는 논란이 다소 있는데, 1908년 5월 18일에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의 ‘대한고적’이라는 기사에는 돌로 만든 돛대와 석장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에 관련된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그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나주군 동문밖에 돌로 만든 돛대 하나가 있는데 그 이름 석장이다. 백제 때 발라군인 나주는 형세가 학교천(현재명: 나주천)이라는 시냇물이 검셩산(금성산)으로부터 흘러 성 가운데를 통해 광탄(금천)으로 들어가는데, 배를 타고 가는 형상이어서 배 돛대를 돌로 만들어 세웠다.
고려 원종 때 나주사록(羅州司錄) 김응덕(金應德)은 나무로 돌 돛대 모양을 만들어 성안의 집집마다 세워두고 죽기를 맹세하고 적(당시 삼별초)으로부터 성을 지키니 적병이 돌 돛대 앞에 침입했을 때 돌 돛대에 뇌성풍파가 일어나 적이 물러났다.
그 후에 그 고을(나주) 사람들이 돌 돛대의 영험함이라하여 지금도(1908년) 나무로 문 앞에 돛대 형상을 만들어 문 앞에 세워 놓는다“라는 내용이다.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의 영험함에 대한 믿음은 근대까지 전해져 문 앞에 돛대 형상을 만들어 세워놓았고, 1970년대까지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 앞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짐대제’라는 제사를 지내거나 신차구입, 사업 시작 등을 할 때 제를 지내는 문화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에 관한 기사가 실린 1908년 5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를 찾아낸 (재)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 허북구 국장은 “짐대제의 짐대는 진압하는 장대인 ‘진대’가 ‘짐대’로 발음되면서 만들어진 용어이며, 그 기원은 고려말 삼별초의 침입에 대항했던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의 영험함과 나주 읍성에 세웠던 진대에서부터 근대까지 가정집 문 앞에 세워둔 석당간 모양의 나무 기둥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또한 허북구 국장은 “이러한 이야기는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과 함께 나주에만 있는 것이며, 나주 읍성의 다른 방어에 관한 역사와 함께 나주를 지켰던 나주사람들의 이야기와 유산으로 전승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자산으로 생각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