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나주역[전남인터넷신문]세계의 전통적인 화훼산지는 과거 도시와 궁궐 인근에서부터 발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던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청과물 산지는 주로 도시 인근에서 소비를 바탕으로 발달되었다.
그런데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1910년 전후에 과수원이 개척된 나주배는 서울 등 소비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나주에서 산지로 발달해 소비지와 생산지가 분리되었다.
그 배경에는 1904년 2월에 나주로 이주해 과수원을 한 마쓰후지 덴노꾸(松藤田六) 등 배 재배 주체의 존재, 과수원에 적당한 토질과 기후조건을 가진 나주의 환경 그리고 나주에서 생산된 배를 소비지로 대량 유통이 가능하게 한 철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주의 배 역사를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의 배 소비처는 주로 서울과 수출용이었다. 1919년 7월 26일자 매일신보의 ‘나주 과물의 성가’라는 기사에 의하면 당시 나주에서는 1천톤 이상의 과일을 생산하였으며, 4년 전에 과물조합을 조직하여 상품의 통일, 판매 방법 등 각 방면에 개량하였다고 나타나 있으며, 일본에 수출까지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후 신문 기사에는 나주배를 만주 등지에 수출했다는 것과 서울 등지에 출하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유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주역이다(사진은 일제 강점기의 나주역). 구 나주역은 곡창인 호남 지역의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1911년 10월에 착공해 1914년에 준공한 호남선의 한 역으로 나주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구 나주역과 나주 배의 관련성은 첫째, 나주 과일의 생산과 유통 관련 조직인 나주군과물조합의 사무실 및 창고를 구 나주역 앞에 건립하여 배를 수매하였다. 나주군과물조합에서 수매한 것은 포장 등을 하여 앞쪽에 있는 구 나주역에서 원거리까지 운송했다.
둘째, 구 나주역 인근에 배 등 과일 통조림 공장을 세웠다. 이 통조림 공장은 다케나카 통조림 제조소(竹中缶詰製造所)로 본사는 일본 교토시(京都市)에 있었고, 1928년경에 제주도 서남부 옹포리(翁浦里)에 분소 공장을 만들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마쓰후지 덴노꾸(松藤田六)가 배와 복숭아를 통조림용으로 판매하기 위해 구 나주역 인근에 있는 달맞이마을(月見村)에 있는 자신의 토지를 내놓으면서 다케나카 통조림 제조소(竹中缶詰製造所)를 유치했다. 당시 나주군에서는 구 나주역에서부터 통조림 공장까지의 도로를 개설해 주었다.
셋째, 과거 구 나주역 및 영산포역과 배의 관련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가고배’이다. 가고배는 바구니는 뜻하는 일본어 가고(かご, 籠)와 배의 결합어로 바구니배라는 뜻이다. 가고배는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구 나주역과 구 영산포역에서 팔았던 ‘바구니배’이다. 특히 구 영산포역은 나주사람들뿐만 아니라 강진, 해남, 장흥, 영암 등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어서 가고배의 판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구 나주역은 이처럼 과거에 나주배와 나주배를 가공한 통조림을 싣고 외부로 나가는 창구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 배를 담은 배바구니를 팔았던 장소로서 나주배의 유통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