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후지 덴로꾸(松藤傳六) 비석의 공적조사 내용[전남인터넷신문]나주배박물관 앞에 눕혀져 있는 세 개의 조각 비석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으나 근대 나주 과수 현황을 알려주는 비밀의 문이다.
근대에 나주는 국내 최대의 과수 산지였으나 그 기록이 많지 않은 가운데, 나주배박물관 앞에 있는 비석의 주인공 공적서를 보면 당시의 과수 현황이 자세히 남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주배박물관 앞 비석의 주인공은 마쓰후지 덴로꾸(松藤傳六)이다. 그의 비석을 세우게 된 공적비의 공적서(사진, 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 제공) 이력에 의하면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미나미다카(南高木郡)에서 1873년 10월 10일에 태어나 1904년 2월에 나주로 이주했으며, 1939년 2월 1일 나주시 금천면 원곡리 221번지에서 사망했다.
마쓰후지 덴로꾸의 공적서 ‘과수원예 보급 장려’ 업적에는 비석이 세워진 1941년 당시의 나주 과수 상황을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어 소개한다.
“본인은 일찍이 메이지 37년 동아시아의 풍운이 심한 현해탄을 작은 배를 저어 헤치며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거슬러 올라가 영산포 부근에 상륙해 지방 사정을 자세히 시찰하고 영산강 연안에 있는 비옥한 황야에 주목해 나주군 금천면에 거주지를 정했다. 수백 개 마을을 걸으며 평원개간에 착수했는데 그 후 기후풍토가 과수재배에 적합한 것을 통찰하여 배, 사과, 복숭아 등의 묘목을 멀리 내지에서 이입해 재배에 착수. 당초에는 묘목의 고사(枯死), 병충해 등으로 예상했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몇 번인가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초지 관철의 의지를 굳게 갖고 불요불굴의 연구 10년에 자금의 대부분을 시설과 연구에 쏟아부어 그 서광을 비추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더욱 분발함으로 근린의 동지를 격려하고 품종 개량, 재배법의 개선, 병충해 구제와 또한 판로의 확장에 일의전심, 그 업의 발전에 노력함과 동시에 귀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후진 동업자를 인도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동지를 규합했다. 종자 분양, 재배법 지도와 판로 알선에 각종 원조를 아끼지 않는 헌신적 지도와 도움의 결과 금천면을 중심으로 한 나주군 과수 집단지는 조선 덴마크라고 칭해지는 이상향이 되었다.
나주 명과의 진가는 내외로 발양되어 20세기 아리랑 명산 배는 맛과 질에서 전국에서 가장 뛰어나서 다른 것에 비교될 수 없이 조선은 물론 일본에 이르러서도 명성이 분분하게 된다. 더욱이 통조림용 황도는 지방 특산으로서 장래 중요산업으로 본인의 헌신적 노력의 성과는 점차 과수원예 발전이 된다.
동업자가 증가함에 따라 이 일의 발전상 생산업자의 통제를 꾀할 필요를 통감하고 업자에게 주창 동의를 얻어 쇼와 8년(1933년) 4월 나주 과수조합을 창립하고 초대조합장으로 취직한다. 가업은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조합사무소에 기거하며 전심으로 조합사업을 통일 재배 개량, 적당한 종자 장려, 병충해 구제 독촉격려, 비료 및 생과 포장 용품 및 필요품의 공동구매, 공동 판매품의 규격통일 판로확장 그 외 생산 판매 양방면에 걸쳐 각종 시설경영에 주야 침식을 잊고 몰두하여 오로지 조합사업 진전에 힘써 그 효과가 크게 나타나 마침내 현재의 기초가 공고한 조합이 되어 목하 동업 조합령에 따른 법인조직으로 바꾸기 위해 수속 중이다. 과수업 발전을 이루려 전 생애를 과수에 바친 본인의 분투는 그 공적이 위대하다.”
이 공적서에는 나주군내 과수원에 현황이 소개되어 있는데, 과수의 식재본수는 복숭아 68,655본, 배 34,272본, 감나무 7,293본, 사과 6,349본, 포도 5,347본으로 사과 등 다양한 과수가 식재되었고, 복숭아나무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가격은 복숭아나무는 어려서 수확량이 적고 배는 성목이 되어 생산액이 많아 배 520,721원, 포도 50,793원, 사과 33,716원, 감 31,781원, 복숭아 30,781원으로 배의 수입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