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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문화 들춰보기: 조선 시대와 과거 나주에서 쪽 재배법 - (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부학회장겸 학술지 편집위원장 허북구
  • 기사등록 2021-10-05 08: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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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조선 후기 농학서에 기록된 쪽의 재배법은 근대의 쪽 재배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 후기 농학서인 색경(穡經,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박세당이 지은 농서), 산림경제(山林經濟, 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이 엮은 농서 겸 가정생활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영조 42년 유학자 유중림이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늘리고 보충하여 간행한 농업책), 해동농서(海東農書, 8세기 후반에 서호수 편찬한 농서)의 재배법을 종합해 보면 음력 3월에 파종→5월에 정식→7월에 수확, 쪽즙 만들기→8월에 채종의 순서임을 알 수 있다. 

 

재배법은 문헌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파종 후 싹이 일정 크기로 자라면 정식을 하였다. 쪽의 수확은 1회부터 3회까지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외국의 서적을 인용하거나 외국 사정을 기록한 것에서 유래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실정과 맞지 않은 것도 있다. 


가령,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저술한 농학백과사전)’에서 명나라의 농학서인 군방보(群芳譜, 명나라 때 왕상진이 편찬한 책으로 갖가지 곡물ㆍ소과ㆍ화훼 등의 종류, 재배법, 효능 등을 설명해 놓은 것)를 인용하면서 3차례 걸쳐 수확을 하고 채종하는 것으로 나타냈는데, 우리나라의 기후 조건상 맞지 않는 작형이다. 

 

19세기 일본의 사정을 기록한 ‘농정신편(農政新編, 1885년에 안종수가 저술한 농서)’에서는 음력 1-2월 파종, 3월 정식, 5월 1차 수확, 6월 2차 수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온난한 지역에 맞는 작형이다. 농상집요(農桑輯要, 중국 원나라 세조 때 대사농사에서 1273년 편찬하여 1286년에 보급한 농서이며, 조선 초기 대표적인 농서로 참조되면서 농업에 큰 영향을 끼친 책)에서는 ‘6월에 겨울쪽(冬藍)을 심을 수 있다. 겨울쪽은 대람(大藍)이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겨울쪽은 대청을 가리킨다. 따라서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의 쪽 재배법을 알고자 할 때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근대 나주에서 쪽 재배 작형은 조선시대 후기 농학서에 소개된 것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한편, 과거 나주에서는 “쪽물을 들이는 일은 쪽의 파종(播種)에서부터라고 했다. 음력 2월이 되면 밭에 씨를 뿌린다. 묘포(苗圃)에는 퇴비나 아니면 고랫재를 넣어서 밑거름을 많이 주어야 한다. 묘가 자라나는 것을 보아 음력 4월 감꽃이 피어나는 망종(芒種) 무렵에 한 포기 한 포기 밭으로 옮긴다”. 이글은 1960년대에 민속학자 예용해 씨가 나주군 문평면 송산리 지산마을의 윤승의(당시, 73세)를 인터뷰한 내용이다(예용해. 1969.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제 4편 산업기술.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 

 

쪽의 파종과 재배에 관한 1940년대 자료를 구입하기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설문으로 조사한 1940년대 쪽의 파종과 재배관리는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쪽은 3, 4월경에 파종을 하였으며, 파종하여 이식하기도 하였고 본 밭에 직접 파종하기도 하였다”(김0동 씨, 79세. 2009년 9월 6일 나주시 공산면 신곡동 나주영상테마파크에서 인터뷰). 

 

“쪽의 이식은 못자리처럼 모종판을 만든 다음 파종을 했다가 발아되어 자라면 옮겨서 심었다. 정식은 1모작 또는 2모작을 하고 난 논밭에 하였는데, 주로 2모작으로 보리를 베고 난 논이나 밭에 정식하였다. 쪽의 이식 시 재식거리는 20⨯20cm 간격으로 하였으며, 한 줄에 4개 정도를 호미로 심었다. 그것보다 가깝게 심으면 빽빽해서 좋지 않았다”(한0수 씨, 83세. 2009년 9월 5일 나주시 영산동 가마태 마을의 자택에서 인터뷰). 

 

 “거름은 밑거름을 주지 않았고, 당시 흥남의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1927년에 창립한 것으로 연 48만톤의 유안 비료를 생산할 수 있는 대규모 유안비료 공장)에서 생산된 유안(암모니아 비료)을 웃거름으로 주었다. 비료를 주고 나면 쑥쑥 자랐다”(한0수 씨, 83세. 2009년 9월 5일 나주시 영산동 가마태 마을의 자택에서 인터뷰). 

 

“밑거름은 주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김0동 씨, 79세. 2009년 9월 6일 나주시 공산면 신곡동 나주영상테마파크에서 인터뷰). “수분관리는 물이 있어야 잘 자라기 때문에 물이 자작자작 있을 정도로 관리를 했으며, 잡초방제는 풀을 일일이 매야 했으나 쪽 밭은 풀을 한 번만 매도된다고 해서 다른 작물의 재배에 비해 잡초방제가 편했었다”(한0수 씨, 83세. 2009년 9월 5일 나주시 영산동 가마태 마을의 자택에서 인터뷰). 과거 나주에서는 이처럼 쪽은 재배 작물로서 재배 작형과 재배법이 만들어져 있었다.

 

참고문헌

김순영. 2008. 농학서를 통해 본 조선후기 남염법의 변천. 한국의류학회지 32(8):1286-1298.

허북구. 2011. 근대 나주의 쪽 문화와 쪽물 염색. 퍼브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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