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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문화 들춰보기: 1940년대 나주에서 쪽재배 장소와 면적 - (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부학회장겸 학술지 편집위원장 허북구
  • 기사등록 2021-10-01 10: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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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재배[전남인터넷신문]우리나라는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먹을거리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하물며 1940년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초목근피로 연명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기에 쪽은 먹을거리가 아닌 데도 논과 밭에 재배되었다.

 

1940년대에 나주에서 쪽 재배를 하던 가정에서는 300-500평 정도씩을 재배하였다. 


대대로 쪽물 염색을 해 온 나주 영산포 한0수가에서는 영산포 석산(나주 영산포에 있는 작은 돌산) 아래의 밭 1,200평에서 쪽 농사를 지었다(한0수 씨, 83세. 2009년 9월 5일 영산동 가마태 마을의 자택에서 인터뷰)는 이야기를 감안할 때 규모 있게 재배를 했던 곳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쪽 재배 장소는 논과 밭에서 재배되었다. “배나무를 베어 내고 복숭아나무를 심었는데, 그 사이에 쪽을 재배하였다.”, “동강면에서는 대부분 쪽은 밭에서 재배하였다.”, “동강면 대전마을에서는 밭이 많아 쪽도 밭에서 재배하였다.”라는 제보처럼 밭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주에서는 논과 밭에서 영산강변의 방목과 포전에서도 쪽이 재배되었다. 방목은 제주에서 배에 싣고 온 말을 영산강변에 두었던 곳이었다(한0수 씨, 83세. 2009년 9월 5일 영산동 가마태 마을의 자택에서 인터뷰). 포전은 채소류 등을 재배하는 논과 밭을 가리키나 나주의 어르신들 대부분은 영산강변에 있는 둔치의 땅을 가리켰다. 그런데, 벼 재배가 어려운 포전에는 주로 쪽, 무 및 대마를 심었다(이0종 씨, 75세, 2009년 4월 19일 다시면 가흥리 삼봉마을에서 인터뷰). 

 

“영산포 포전은 전부 쪽밭이었을 정도로 많이 재배했다(한0수 씨, 83세. 2009년 9월 5일 영산동 가마태 마을의 자택에서 인터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영산강변의 포전은 쪽을 재배하기에 좋았다. “1950년대 이전에는 영산강변 곳곳에 쪽이 자랄 만큼 쪽이 많았다. 그렇기에 논밭이 없는 사람들은 강가에 주인 없는 땅(하천 등)에 자란 쪽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를 얻은 다음 베어서 쪽물을 만들었다. 강가에 모래땅은 퇴적층이어서 거름을 주지 않아도 쪽이 잘 자랐다. 

 

그리고 쪽은 물을 좋아하면서도 물 빠짐이 좋은 곳에서 잘 자라는데, 포전은 물 빠짐이 좋으면서 물이 자작자작 있는 곳이 많아 쪽 재배지로서 좋았다(김0동 씨, 79세. 2009년 9월 6일 공산면 신곡동 나주영상테마파크에서 인터뷰).

 

한편, 이0진 씨(76세, 2011년 10월 9일 공산면 금곡리 대한노인회공산분회 경로당에서 인터뷰)에 의하면 1940년대에는 박하와 쪽이 굉장히 많았는데 요즈음은 둘 다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옆에 계시던 분들도 옛날에는 하천가에 쪽이 많이 자랐기 때문에 베어다 쪽물을 만들었는데, 요즈음은 없다고 하였다. 

 

정0여 씨(79세, 2011년 10월 2일 영산동 용산 주공아파트 자택에서 인터뷰)는 쪽은 하천가에 많이 자랐는데 소도 안 먹기 때문에 염료 외에는 쓸모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제보들을 감안해 볼 때 쪽은 야생상태에서도 자라고 있었을 만큼 흔한 식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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