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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문화 들춰보기: 나주 사람들의 직조 솜씨, 짚풀공예와 골풀 문화 - (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부학회장겸 학술지 편집위원장 허북구
  • 기사등록 2021-08-20 10: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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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1937년 5월 8일, 일본 문예 운동 창시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는 목포에서 광주를 향하는 길에 다시면의 석천(石川) 기슭에서 열린 다시장을 찾았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 때 다시 장의 풍경을 전라기행(全羅紀行)이라는 기록에 남겼다. 

 

그 기록에 의하면 “강가의 자갈밭에는 여러 가지 물건과 사람이 늘어서 있다. 온통 푸른 들판 가운데 유독 이곳만은 번화하다. 


이곳은 유명한 다시 무명의 고장이라고 한다. 품질이 매우 좋아 일반값이 팔, 구엔이며, 상등품이 되면 이십엔을 호가한다. 본래 수직으로 만든 흰 면직물이다. 


우지(宇治, 일본 교토에 있는 지명)에서는 한근에 육, 칠십엔 하는 옥로(玉露, 옥로차)가 만들어졌고 도쿄에는 한 첩에 사십엔 하는 김이 있다고 한다. 남모르게 맛보는 자가 있기에 제격인 가격일 것이다. 


다시(다시면)와 같은 시골 무명이 그만한 시가를 부르는 것도 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인간의 유별난 깊은 면을 건드리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한필을 샀다. 무명 직물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직물이다. 오래 지속해 주면 좋겠다.”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다시면의 장에서 본 무명에 대해 당시 일본의 최고 명차인 우지(宇治) 옥로차에 비유해서 표현할 정도도 나주 다시의 무명(다시 세목, 샛골나이)은 뛰어난 직조 솜씨의 절정체였다. 나주는 샛골나이 무명 외에 금성주(錦城紬)로 불리는 비단, 죽공예품 등 직조문화가 발달한 곳이었으며, 그와 관련된 내용의 일부는 이전의 기고문에서 소개했다.

 

나주에서는 이전에 소개했던 것과 같이 골풀 공예가 왕성했고, 화문석의 최대 산지였다. 이 골풀공예 기술은 나주의 짚풀공예와 무관하지 않다. 나주평야는 국내 대표적인 벼 생산지였으며, 벼 재배 부산물인 짚풀을 이용해서 다양한 생활도구를 만든 공예기술을 탄생시켰다.

 

나주에서 짚풀공예는 1970년대까지만 대부분의 마을에서 무엇이든 못 만드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를 만들었고, 미적으로도 훌륭했다. 짚풀공예품은 공방에서 따로 만들었던 것은 아니고 동네 사랑방에서 만들었다.

 

나주 금천면 출신의 국내 대표적인 짚풀공예가인 김종철 장인(1948년생)은 중학생 때부터  짚풀공예의 매력에 빠져 사랑방에서 어르신들에게 짚풀 공예를 배워서 나주의 전통 짚풀공예를 전승하고 있다(사진은 김종철 짚풀공예 장인의 작품). 김종철 장인은 어르신들에게 배운 나주 전통 짚풀공예뿐만 아니라 60여년간 짚풀공예를 하면서 왕골 등 다양한 소재 활용과 함께 독창적인 공예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것 또한 많다. 

 

김종철 장인의 나주 전통 짚풀공예와 독자적인 풀공예는 골풀에 적용할 수가 있기 때문에 "나주 전통 짚풀 공예 +나주 전통 골풀 공예"로 나주의 골풀 문화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다. 나주 골풀 문화는 이 외에 한국천연염색박물관의 천연염색 등 나주의 공예문화자원과 연계시키고 활용하면 나주만의 차별화된 문화로 발전 가능성이 매우 큰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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