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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문화 들춰보기: 1960년대 나주 민가에서 부채의 제작 - (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부학회장겸 학술지 편집위원장 허북구
  • 기사등록 2021-07-24 09: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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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매일경제신문 1967년 7월 7일자 지면 “여성살롱”이라는 제목의 코너에 부채를 소개한 기사가 있는데, 소제목은 ‘우리나라선 나주산(羅州産)’이다. 


나주산 부채는 그만큼 유명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나주공예품제작소’ 등지에서 대량으로 생산을 하였다(사진은 나주공예품제작소에서 제작한 부채이다). 

 

부채의 명산지 나주에서 부채의 제작은 전문점뿐만 아니라 민가에도 보급되어 1960년대까지 민가에서 부채를 만들어 이용했던 문화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곳이 나주 영산포에 있는 대박촌(대기리)이다. 대박촌은 과거에 완초(莞草)와 인초(골풀) 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왕골과 인초공예가 발달했었다. 

 

나주에서 인초재배 농가는 1960년대 말 기준 600호가 넘었으며, 전국 유일의 인초 특화 재배 및 다수의 공장이 존재하는 등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수출 장려품으로 나주 인초 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었으며, 고 박정희 대통령이 나주 인초공장을 방문했었다.

 

인초공예가 발달했던 1960년대 말 대박촌의 이0동씨 집에서는 머슴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사랑방에서 부채를 만들었다. 주로 겨울철에 일이 없을 때 부채를 만들었다. 이 부채는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등 생활 속에서 사용되었고, 단오 때 쯤 되면 선물용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부채의 제작은 대나무로 부챗살을 만들거나 대나무를 쪼갠 후 납작하고 얇게 다듬고, 이것을 직조하듯이 엮은 후 가장자리에 천을 덧댄 다음 실로 꿰맨 것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주 대박촌 마을에서 부채는 이0동 씨 집 외에 다른 집에서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에서 부채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부채 제작 기술이 널리 보급되었던 것과 함께 이 마을에는 왕골을 부업으로 하면서 공예기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부챗살에는 문풍지, 한복 안감 천 등을 이용했었다. 부채의 모양은 대 살을 이용해서 나주 단선과 같이 만든 것도 있었고, 비닐포대를 뜯어서 조악하게 만든 것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부채는 양산처럼 크게 만들어 여름철에 한속으로 들면 부채 윗부분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연잎의 자루를 들고 있는 것처럼 그늘이 만들어지도록 이용하기도 했다.

 

대박촌은 한박산 아래쪽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종이꽃 만드는 집, 상여집, 관 짜는 곳 등 공예품과 생활도구를 많이 만들었던 마을이다. 더욱이 영산포 시장과 가까워 과거에는 부채 등의 공예품을 만들어서 영산포장(영산포 5일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1960년대 안창리 마을에서는 배0옥씨가 접부채를 만들었다. 대나무를 잘라서 부챗살을 만들어 합죽선을 만들었는데, 생업으로는 하지 않았으나 부채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나주에서는 이와같이 1960년까지만 해도 부채를 만드는 기술이 민가에까지 존재했으며, 부업으로 부채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가정도 있었다. 그 부채 제작기술은 과거 부채고을로 명성 높았던 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원고 작성에 도움 말씀을 주신 나주문화관광해설사인 이성자 님, 김정숙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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