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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문화 들춰보기: 수출 상품이었던 나주부채 - (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부학회장겸 학술지 편집위원장 허북구
  • 기사등록 2021-07-17 0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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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일제 강점기에 나주에서 만들어졌던 부채는 해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배경은 일제 강점기에 나주부채가 주요 수출 상품이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1937년 6월 3일자 동아일보의 견본시주효(見本市奏效)라는 제목의 기사 부제목은 ‘십여만원 초주문, 해태를 위시 죽제품 금성선 등’이다. 

 

견본시주효(見本市奏效) 기사 내용에는 전남도에서는 금년에 새로 설치된 상공과에서 지난 4월 말에 다수의 특산품축을 갖고 만주로 파견되어 대련(大連), 봉천(奉天), 신경(新京), 함이빈(唅爾賓), 안동(安東) 등 5개 도시에서 견본시를 개설하고 각지 유력업자를 초대하여 의견 희망 등을 청취했다. 전남 특산인 죽제품, 금성선(錦城扇) 외 십 수건을 주문받아 십여만원이 된다는 것이 있다.

 

이 신문 기사의 부제목에 등장하는 금성선(錦城扇)은 금성부채라는 뜻이다. 금성(錦城)은 나주의 옛 이름이며, 일제 강점기에 생산된 금성선에는 대부분 ‘나주공예품제작소’라는 글씨가 있다. 나주공예품제작소는 1913년에 설립된 것으로 부채와 대발 등을 생산했던 곳이다.

 

조선일보 1926년 1월 5일자 신문 ‘나주 유일(羅州唯一)의 잠종제조가(蠶種製造家)’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나주 미선(尾扇, 부채)와 죽렴(竹簾)은 조선 특산품의 일종으로 국내의 수용은 물론이거니와 근래 외국에도 종종 수출되는 형편인바 만반이 쇠잔하여 가는 현상에 있어 이것까지 외인에게 피탈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 죽세공을 유지한 것은 동군(同郡)의 승봉렬씨였다. 공방의 설비가 없고 각기 자가에서 제조하는 것을 수합 함에 불과하나 금년에도 미선(尾扇) 이만병과 죽렴(竹簾) 삼천장을 산출하여 조선 내의 각 도회지와 상해(上海)에 수출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동아일보 1931년 10월 21일자 ‘조선에 굴지한 나주렴선죽추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전남 나주의 특산물인 발(簾), 부채(扇), 대비(竹箒) 등은 전조선 각지는 물론 외국에까지도 다수히 수출됨은 일반이 다 아는 바...”라는 기사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나주부채가 이처럼 주요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은 데는 전통 기술, 재료와 명성이 있었고, 1913년에 설립된 ‘나주공예품제작소’도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 기술 측면은 동아일보 1932년 6월 3일자 ‘미선과 주렴의 품질개선 노력’이라는 기사에 “전남 나주의 특산인 나주미선(나주부채)과 주렴(발)은 조선의 자랑이 되는 미술품의 하나임은 세인의 공인하는 바이어니와....”라는 내용에서 나주부채의 명성을 유추할 수 있다.

 

나주공예품제작소와 관련해서는 경성일보(京城日報) 1923년 10월 6일-10월 7일자 신문에 “나주공예품제작소가 설립되고 나서 새로운 제품 개발, 지방비의 보조 아래 직공 양성에 노력한 결과 주문에 신속하게 대응해서 성황이다”라는 기사를 근거로 유추해 보면 나주공예품제작소가 수출용 부채의 대량 생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당시 나주공예품제작소에서 생산되어 만주 등지에 수출했던 특산품의 하나였던 금성선(錦城扇) 유물(사진)은 일본 등지에 많이 존재하며, 해외로 수출되었던 나주부채와 공예품의 위상에 대한 물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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