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조선 최고로 명성 높았던 나주부채의 전승은 끊겼다는 주장이 많다.
그 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그 말이 옳은 것은 나주부채를 업으로 해 오던 공방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 말이 그른 것은 전통적으로 만들어 왔던 기술의 전승 보유자는 생존해 있다는 점이다(후에 기고 예정).
천년 혹은 적어도 수백 년을 이어왔던 나주부채의 전업 공방은 1980년대에 맥이 끊겼다. 마지막까지 부채 공방을 했던 이는 고 김홍식(金鴻植) 장인이다(사진은 김홍식 장인이 만든 단선으로 나주 남파고택 소장품이다). 고 김홍식 장인이 나주부채의 기능 전승자임은 문화공보부(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969년에 발간한 ‘한국민속종합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이 보고서에는 “나주읍 서내동 전승자 김홍식(남 53세)은 이 지방 선방(扇房, 부채공방)의 최연장자 격인 모기남(牟基南, 80세, 생존)씨에게 일을 배웠고, 중년부터 생업으로 삼아왔다”는 내용이 있어 전승 계보가 나타나 있다.
공방에 대해서는 “나주읍 서내동 771번지 납작한 기와집 뒷결의 조그만 작업장에서 소동(小童)을 하나 데리고 일한다. 작업장에선 대를 저르고 굽은 살을 취는 일만 할 뿐, 종이를 붙이는 일은 가족 중 부녀자(婦女子)가 방, 마루서 일한다. 곧 집안이 모두 작업장인 셈이다.”라고 해서 집 자체가 공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방의 수와 수입에 대해서는 “근래의 일반 미선처럼 염가다량(廉價多量) 생산이 안 되는 세공업이므로 아주 쇠퇴, 나주 인근에서 단 한집이 명맥(命脈)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도 연간 1천개도 소비 못하는 실정이다. 가격은 김씨가 내는 값이 15원, 당지(當地) 소매가는 30원이다.”라고 해서 나주에서 부채공방은 1개이며, 연간 수입은 15,000원 정도 됨을 알 수 있다.
품질에 대해서 ‘한국민속종합보고서(1969)’에는 “제품은 아주 조잡한 편이다. 살은 굵고 성글며 바대 용지도 백로지(白露紙), 선면지는 일산(日産) 롤지로 대용하여 손쉽게 처리(니스)로 윤택을 내고 있다. 자루의 소나무 조사 거칠기 짝이 없고 아구가 헤벌어지게 텄다. 야무진 데가 없이 투박한 제품인데 격식을 다 갖추면 수지(收支)가 안 맞는다는 대답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품은 조잡하나 그 원인은 수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주부채를 조사하여 수록한 ‘한국민속종합보고서’는 1969년에 발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시기에 사업으로서 공방 운영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는데, 김홍식 장인은 1980년대 초까지 공방을 운영했다.
국가무형문화재 99호인 소반장 김춘식 선생에 의하면 “김홍식씨는 죽림동에 부채공장을 세워서 딸과 함께 1년에 700-800개의 부채를 만들었다. 부채 손잡이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부채 개수를 알 수 있었다. 1984년 3월 말쯤에 고기를 떠서 찾아갔는데, 1-2주 후쯤에 작고 하셨다”(2017년 12월 12일 나주반전수관에서 인터뷰를 함). 김홍식 장인의 작고로 최소한 수백년을 이어온 나주부채의 전업 공방은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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