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나주에 있는 금성산(錦城山)의 높이는 451m이다.
지리산(1915m), 광양 백운산(1222m), 영암 월출산(809m), 장성 백암산(741m), 무등산(556m) 등과 비교하면 야트막한 산이다.
동쪽의 노적봉, 서쪽의 오도봉, 남쪽의 다복봉, 북쪽의 정녕봉이라는 4개의 봉오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금성산은 산세가 특별히 수려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을 뒷산과 같은 금성산이나 고려 때부터 명산으로 알려져서 왕실은 물론이고, 민가에서도 산악신앙으로 신성시 하였으며, 그 전통은 조선시대가지 이어졌다.
나주 금성산이 신앙으로 등재되어 금성산신제가 국가 제사로 승격된 것은 고려 6대 임금 성종(成宗, 981-997) 때 제사 규정의 정비에 의해서였다.
금성산신은 금성대왕(錦城大王)으로 불리어 졌는데, 고려사(高麗史) 권106(列傳) 19심양(沁諹)에 금성대왕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세기 이전부터 금성대왕으로 추앙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20대 충렬왕(忠烈王, 1274-1308)은 금성산 산신(山神)이 정령공(定寧公)으로 봉하고, 나주읍의 녹미(祿米) 5석(石)을 거두어 해마다 금성산의 사(祠)에 보내졌다.
금성산은 조선시대에도 국가가 제사하는 산으로 위상을 유지했다. 조선 태조는 왕조 건국 이듬해인 1393년에 금성산을 호국백(護國伯, 나라를 지키는 으뜸가는 산신)으로 정하였다. 고려왕실에서는 금성대왕신앙을 적극 지원했고, 금성산 일대에 사당을 지었다.
금성산신인 금성대왕은 사당에서 모셨는데, 조선 초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금성 산신제를 치렀던 사당은 다섯 개가 있었다. 사당은 산마루에 상실사(上室祠), 산허리에 중실사(中室祠), 산기슭에 하실사(下室祠), 하실사 남쪽의 국제사(國祭祠), 고을 읍성 안에 녜조당(禰朝堂)이 있었다.
네 개의 사당은 금성산신제는 지내는 핵심적인 장소 역할을 했으나,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폐단이 생기면서 조선 후기에는 축소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없어졌다.
한편, 금성산신이 영험한 것으로 알려져 나주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금성대왕을 주신(主神)으로 모셨으며, 한양으로 입성했다. 조선왕실에서는 한양으로 입성한 금성대왕 신앙에 대해 구파발의 진관동(은평구), 노들의 망원동(마포)과 각심절의 월계동(노원)의 세 곳에 금성당(錦城堂) 건립과 수도권 금성대왕 신앙 확장을 후원 및 뒷받침하였다.
한양에 건립된 세곳의 금성당에서는 금성대왕을 모시며, 매년 금성산신제를 지냈으나 노들과 각실점 금성당은 1970년 새마을운동과 도시개발 과정에서 없어졌고, 구파발의 금성당(사진)만 남아있다. 구파발의 금성당은 2008년에 국가민속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6년 5월 25일 샤머니즘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이곳에서는 서울 은평구의 지원과 샤머니즘박물관 관장이자 민속학자인 양종승 박사의 주도로 매년 금성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고려 때부터 시작된 금성산신제는 나주에서 단절되었으나 서울 구파발에서는 여전히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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