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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우녁장사 김부각과 매화 - 농업 칼럼니스트 농학박사 허북구
  • 기사등록 2021-03-22 07: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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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인터넷신문]최근 김부각이 한옥 체험 리얼리티 방송에서 나온 후 인기 급상승 중이다. 김부각은 김에 양념한 찹쌀풀을 바르고 통깨 등을 뿌려 말린 다음 식용유에 튀긴 것이다. 과거에는 김 생산지 위주로 많이 만들었던 김부각이 지금은 내륙 등 각지에서 생산되면서 산지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전남에서 김부각을 생산하는 곳은 많은데 그중에서 광양은 김부각과 인연이 많은 곳이다. 김부각의 재료인 김은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때부터 먹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1600년대에 광양에서 처음으로 양식되었다. 광양에서 김양식은 일본보다 앞선 것으로 광양 태인도 김여익(金汝翼, 1606-1660년)이라는 사람이 양식법을 개발했다.

 

김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 등 많은 문헌에는 해의(海衣)로 기록돼 있다. 19세기 말에 기록된 요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와 1925년 정문기(鄭文基)가 광양 섬진강 하구의 김양식에 대해 쓴 조선해태(朝鮮海苔)에는 해태로 기록돼 있다. 오늘날에는 ‘김’이 표준어로 정착되어 있는데, 이것은 광양 태인도에서 최초로 김양식을 한 김여익의 성(姓)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광양은 그만큼 김과 관련이 많은 곳이자 주산지였다.

 

광양은 과거 김의 주산지였을 뿐만 아니라 김부각의 명성도 높았다. 광양 김부각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맛도 맛이지만 우녁장사와 관련이 깊다. 우녁장사는 윗녘장사의 방언으로 윗 지방에 가서 장사를 하는 것인데, 1960~1970년대쯤 광양에는 우녁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광양의 우녁장사들은 광양만에서 생산된 건어물과 김, 김부각 등을 위쪽의 내륙지방에서 가서 팔고, 내륙지방의 인삼 등을 구매 후 내려오면서 판매했다. 당시 광양의 우녁장사들에게 최고 인기 상품은 김부각이었다. 김도 인기 상품이었으나 부피가 컸고, 김부각은 부피가 작고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았다. 그래서 광양의 김부각은 우녁장사를 통해 각지로 인기리에 판매되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명성이 높았던 광양 김부각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우녁장사가 없어진 것과 더불어 김부각의 재료인 김 산지에 광양제철소가 생기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광양 김부각을 제조하고 판매했던 분들, 광양 김부각을 열광적으로 구매했던 분들도 거의 고인이 되면서 광양 김부각의 명성도 거의 잊혀졌다.

 

우녁장사와 함께 잊혀졌던 광양 김부각이 최근 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김부각을 생산하는 업체가 생겨났고, 인지도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명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역사성과 전통이 있으나 오늘날에 맞는 차별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 원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활용 필요성이 큰데,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잇는 것이 매화이다. 광양의 매실 생산량은 전국 대비 20%가 넘고, 광양매화축제 개최 시기에는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며, 전국적인 인지도 또한 매우 높다. 

 

광양 매화의 이러한 특성을 살려 김부각 제조 과정에서 매실 소스의 활용, 마무리 단계에서 매화 압화를 이용한 장식 등을 도입하면 ‘과거의 명성(광양 우녁장사 김부각) +현재의 인지도(매화)’가 결합되면서 과거의 명성이 현재의 김부각을 살리고, 현재의 인지도가 과거의 명성을 되살려 ‘광양 우녁장사 김부각’의 명성을 되찾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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