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김상봉 기자]조사단장 홍순석 교수가 공개한<망곡서> 관련 문헌기록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1929)’, ‘장흥지속록長興誌續錄(1939)’, ‘장흥지長興誌(1966)’3건인데, 문헌에는「斯」자가「於」로, 「多」자가「之」, 「而」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의 유학자 위원량이 경술국치의 사실을 듣고 울분을 토로하고자 수리봉 정상에 올라와 칠언절구를 짓고, 암각문을 조성한 것이다. 칠언절구를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登臨是日感斯峰- 오늘 올라와 이 봉우리에서 느끼나니
ㄷ是東邦守義峰- 이 봉우리야말로 동방의 의를 지킨 봉우리네
人多不守峰能守- 사람 많아도 못 지킨 것을 봉우리는 지키니
可以人兮不似峯- 사람이 이 봉우리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네
‘조선환여승람’에는 회은 위원량의<송암정松巖亭> 시도 수록되어 있는데, <망곡서>와 관련된 중요한 단서이다.
隙地煙霞築一樓- 안개 노을 빈터에 누정 하나를 지으니
洞門深鎖遠漁洲- 마을 입구는 굳게 닫혀져 물가에서 멀고
有期月滿靑山面- 달이 푸른 산에 꽉 차기만 기다리는데
不種花開老石頭- 심지 않은 꽃이 오랜 돌 머리에 피었네
何必苟求名利得- 어찌 꼭 구차히 명예와 이득을 구할꼬
莫如安分讀書留- 분수 지켜 독서하며 머무는 것만 못하리
於今仰數先天事- 지금 우러러 지난 일들을 헤아리니
恨未勤王庚戌秋- 경술년 가을에 근왕하지 못함이 한스럽네
<송암정>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경술년 가을에 근왕하지 못함이 한스럽네”라 한 것은 바로<망곡서> 암각문이 조성된 경술년 당시를 회상해서 말한 것이다.
이날2차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 가운데<망곡서> 암각문이 정북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가 깊다. 수리봉의 여러 바위 면에서 고종 황제가 있는 북향의 바위 면을 택하여 암각문을 조성한 것이다. 그만큼<망곡서> 암각문은 회은 위원량 선생의 결연한 우국충정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공개한 홍순석 조사단장의 자료와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보면, 수리봉<망곡서> 암각문은 다음과 같은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필서자 회은 위원량은 문림의향 장흥의 지역 콘텐츠에 부합하는 근대시기의 장흥의 문사이자 의리를 실천한 학자임을 암각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근대시기 중1905년 을미사변과1910년 한일합병은 전국 유림의 의병 활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장흥 지역의 문사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연재 송병선이1905년에 자결하고, 1910년 매천 황현이<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29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 위원량이 수리봉에 통한을 참아내며 암각문을 조성했을 정황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단지 지면에 남긴 시문과는 격이 다르다. “경술년 가을에 위원량이 삼가 절하고 곡하며 쓴다”는 관지까지 바위에 새긴 것은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조정의 관료들이 사직하거나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며 지은 망배시(望拜詩)와는 차원이 다르다.
경술년 전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분개하고, 지사들은 순절하며 절명시를 남겼던 시기에 이처럼 완벽한 암각문으로 당시의 정황을 토로한 자료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근대시기 호남 지역의 항일의병 활동 관련 사료로서도 주목될 것이다. 문헌과 증언 자료 외에<망곡서>와 같은 암각문을 통해서 현장의 사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기하였다는 점에서도 이 자료는 의미가 깊다.
회은 위원량의<망곡서> 암각문은 암각문의 구성 요소인 본문과 관지, 판곽까지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석학 분야에서의 가치도 높다.
회은 위원량의<망곡서> 관련 언론 방송보도가 되면서, 후손으로부터 회은의 초상, 고택, 묘역 관련 사진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장흥위씨 문중의 사적과 연관된 관심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회은 선생 관련 자료는 향후 방촌유물전시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jnnews.co.kr/news/view.php?idx=298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