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지방의 관사는 직위와 용도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전국 8도의 관찰사(觀察使)가 정무(政務)를 보았던 청사(廳舍)는 감영(監營)이라 했다. 전라도에는 전주에 전라감영이 있었는데, 소실되었다가 복원됐다.
관찰사는 종2품(從2品)이며, 관찰사 밑에는 목(牧)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外職) 문관이 있었는데, 목사(牧使)가 정무를 보던 청사는 일반적으로 동헌(東軒)이라 한다.
동헌이 수령의 정무(政務)를 수행하는 공적 공간이라면 내아(內衙))는 수령의 생활공간으로 사적인 공간이다. 주로 수령의 가족이 거쳐하던 내아(內衙)는 내당(內堂). 내사(內舍). 내옥(內屋)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목(牧)의 지위를 가졌던 나주에서 나주목사의 동헌으로는 제금헌(制錦軒)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동헌의 정문으로 건립된 정수루(正綏樓)만 남아 있다.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는 정수루에서 서쪽으로 약 65m되는 곳에 정남향으로 놓여 있으며, 금학헌(琴鶴軒)으로 불리었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기조가 깃든 집”이라는 뜻을 지닌 금학헌은 나주 읍성에 있었던 많은 관아 건축 중에서 객사인 금성관과 아문(衙門)인 정수루 등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다.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된 팔작지붕이며, 본채와 문간채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간채는 본채와 20m의 거리를 두고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
건립 시기는 1872년(고종 9)에 그려진 나주의 고지도에 나와 있지 않으며, 문간채가 189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고쳐서 사용되다가 문화재로 유지관리되었다.
2009년 숙박 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거듭났다. 노령산맥에서 내려온 용이 영산강 물을 마시려고 머리를 댔을 때 정수리 부분이 목사내아라는 풍수설이 있다. 나주목사내아에 머문 사람들은 시험운, 관운 등이 있었다는 소문과 함께 옛 목사의 기를 받아 좋은 일들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사람들로 인해 찾는 이들이 많다. 큰 방 2개와 작은 방 4개에는 천연염색의 고장 나주를 상징하는 천연염색 침구류가 마련되어 있다.
■ 나주목사내아
위치 : 나주시 금계동
안내 : 숙박 유료(외부 관람은 무료)
정보 :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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