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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주 둘러보기: 일제 강점기의 영산포 권세가 집, 일본인 지주가옥 - (재)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 연구사업팀장 김대국
  • 기사등록 2021-01-11 09: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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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군 영산포 시장은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에 일본 사람 흑주저태랑(黑住猪太郞)의 소유지가 되었다가 지금까지 옮기지 않고(영산포 중앙)장으로 보아 오던 중 지난 칠일에 돌연히 지주 흑주로부터 장을 가마니검사소 광장으로 이전하라며 시장의 가게를 일일이 뜯게 하여 ‘쇠울’을 막음으로 일반 장꾼들은 할 수 없이 사분오열의 상태로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지난 십이일에는 전 시장에서 북으로 약 사오정되는 하야희삼랑(河野喜三郞)의 상원(桑園)으로 이전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을 탐문 한 바에 의하면 구시장은 영산포 시가지의 중앙임으로 영산포 각 상점은 물론이거니와 상인들에게도 편리하며 장사도 잘됨으로 시장으로 가장 적당하다 할 수 있는데, 시장 근처가 번화함에 따라 땅값이 폭등함을 기회로 재래시장 임대료로 평당 1개월간 3전 이상 5전 이하로 장사꾼들에게 빌려주었으나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자기 소유지인 가마니검사소 광장으로 이전하라 하나...중락. 1929년 10월 26일 동아일보의 ‘영산포 시장 위치 이전 분규’와 조선일보의 ‘영산포시장 이전에 분두, 신시장에는 흥정이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이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흑주저태랑(黑住猪太郞, 구로즈미이타로)은 1873년에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에서태어 났다. 조선에 오기 전인 1903년 3월에 오카야마 현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던 흑주저태랑은 32살 때인 1905년(명치 38)에 목포를 거쳐 5월 30일에 나주 영산포로 이사를 왔다. 나주 영산포에 도착한 그는 은행에서 농지매입자금을 빌려서 영산강변의 저렴한 땅을 사서 개간을 하였다. 1909년에는 영산포에서 제일가는 지주가 되었고, 1930년에는 논 487ha, 밭 239ha를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그는 땅만 많은 것이 아니었으며, 여러 가지 사업을 했고, 공직도 맡았다. 조선 가마니 주식회사 사장, 다시 수리조합장, 전남중앙영농자조합장과 관선 도 평의회원을 했다. 도 평의회(道評議會) 또는 도회(道會)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13도에 설치된 최초의 광역 의회였다. 영산포에서 흑주저태랑의 목소리는 높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당시에 신문에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

 

일본에서 나주에 이민을 와서 크게 성공한 일본인 흑주저태랑(黑住猪太郞)의 집은 현재 나주시 영산동 영산포 본정통 근처에 있다. 이 주택은 1935년 경에 일본에서 청기와와 모든 자재를 가져와서 지은 것이다. 해방 후 선교사가 고아원으로 운영하였고, 1981년에는 개인이 매입해 주택으로 사용하였다. 나주시에서는 근대문화유산의 보존 차원에서 2009년에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목조건물인 이 주택은 다다미(たたみ, 속에 짚을 5cm 두께로 넣고 위에 돗자리를 씌워 꿰맨 것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일본 전통적인 바닥재) 등 일본 전통적인 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집 왼쪽에는 서양의 주택을 흉내 낸 서양풍의 사무실이 붙어 있다.

 

■ 일본인 지주가옥

위치 : 나주시 영산동

안내 : 무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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