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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주 둘러보기: 석양이 내려 앉는문, 서성문 - (재)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 연구사업팀장 김대국
  • 기사등록 2021-01-02 10: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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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원도심에 자리한 나주읍성은 국내 최대 규모의 읍성이다. 나주읍성 중앙에 있는 금성관의 서쪽에는 서성문(西城門)이 있다. 서성문의 편액은 영금문(映錦門)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1815년에 편찬된 것으로 전하는 '나주목여지승람'에 '동남북 삼문에는 편액이 없으며 서문에만 영금문이라는 편액이 있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영금문은 비출영(映), 비단금(錦), 문문(門)으로 이루어진 명칭이지만 그 유래는 불분명하다.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비단을 비추는 문 쯤으로 해석이 가능한데, 왠지 어색하다. 서성문이 금성산(錦城山)의 산기슭에 있으며, 저녁노을이 바라다보이는 위치라는 점에서 금(錦)자를 금성산(錦城山)으로 해석하고, 영(映)은 석양의 노을로 해석하거나 해 질 무렵에 금성산의 그늘이 내려앉는 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럴싸해 보인다.

 

영금문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조금 모호한 것처럼 서성문에 스며있는 참혹한 역사는 정체성이 애매한 구석이 있다. 1894년 나주 서성문 일대에서는 읍성으로 진입하려 는 동학군 3,000여명과 이를 막기 쉬한 수성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군은 4차례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남겼을뿐 나주읍성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나주읍성 수성군은 읍성을 지켜냈지만 나주읍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됐다. 나주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의 전봉준 장군은 정읍과 순창 등을 도피하다가 잡혀 다시 나주로 끌려오고 한양으로 압송된다. 역사 자료에서 보았던 장면이 대부분 나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수성군과 동학농민군 모두 우리 민족이라는 점에서 정체성에 혼란이 생기는 곳이 서성문이다.

 

대학생들이 군사 독재에 항거했던 시절. 대학교를 다니다가 군입대 해서 전투경찰로 선발된 학생들은 학생들의 데모를 막아야 했다. 같은 학생이었고, 친구 사이였던 사람들이 서로 대립된 위치에 있어야 했던 우울한 시기였던 것처럼 나주 서성문도 그런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원래의 서성문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철거되었다. 지금의 서성문은 고증을 거쳐 2009년 6월부터 3년여의 기간 동안 공사를 해서 2011년에 전통 성문 문루(門樓)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甕城) 등을 복원했다.

 

나주 서성문 일대는 잃어버린 나주 원도심의 옛 모습을 되찾고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전통 한옥지구 건설이 한창이다. 도시재생 사업도 함께 이루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옹기종기 붙어 있던 집들은 헐리고, 한옥과 함께 게스트하우스, 카페, 빵집, 공방 등이 들어서고 있다. 이것이 옛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날까 봐 우려스러운 면도 있으나 이 모든 것들이 역사일 것이며, 또 한 번 변혁의 역사 중심에 있다. 그 현장에서 과거를 생각하고, 현재를 살피며, 미래를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으면 한다.

 

■ 서성문

위치 : 나주시 서내동

안내 : 연중 무료 자유 관람

정보 : 문화재청 사적 3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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