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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O. 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태극기 실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데니가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정치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다 귀국할 때 가져간 것을 그의 후손(William Ralston)이 1981년에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광목 두 폭을 이어 박은 바탕의 테두리는 손바느질로 마감했고 양방은 홍색, 음방과 4괘는 청색 옷감을 오려 재봉틀을 사용해 제작한 대형 태극기이다. 태극문양의 양방과 음방은 가늘고 긴 몸통으로 원 중앙을 향해 회오리처럼 머리를 휘어감은 형태이고 깃대선에는 위 아래로 달려있는 깃대끈을 단단히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넣어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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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1876~1949) 주석이 1941년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미우스 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로, 신부가 미국 뉴욕에서 약 1년 동안 활동하다 중국으로 돌아갈 때 안창호의 부인(이혜련)에게 전달한 것을 1985년 3월에 유족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이 태극기는 옷감을 덧대 홍색의 양방과 청색의 음방, 흑색의 4괘를 재봉틀로 박음질 했고 태극문양은 세로방향으로 감싸 안는 형태이다. 바탕에는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들의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 친필 묵서가 쓰여져 있어, 광복 의지가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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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승만 박사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한국독립 만찬회를 열 때 사용했다고 알려진 태극기로, 1981년 9월 재미동포 김동준씨가 이 호텔에 방문했다가 옛 태극기임을 알고 새 태극기와 교환 후 대한민국국회에 기증한 것이다.
1930년대 워싱턴의 깃발 제작 회사에서 만든 것이며, 두꺼운 면직물에 태극문양과 4괘를 재봉틀로 정교하게 겹 박음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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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 출신 버스비어(A. W. Busbea)가 2005년 11월 미국 아칸소주 리틀록시 맥아더공원에서 열린 한국전쟁기념광장 기공식에서 경기 하남시에 기증한 태극기.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을 위한 전투 중 우리시민이 버스비어에게 건네준 것을 전쟁기간 내내 군용트럭에 꽂고 다니다 귀국 시 갖고 돌아가 50여 년간 보관한 것이다.
태극기 바탕에 괘의 밑그림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색을 칠한 것으로 원래는 일장기였던 것을 시민이 태극기로 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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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동덕여자의숙 개교와 함께 교정에 게양됐던 태극기. 국권 피탈 이후 36년간 장롱 속 나무상자나 땅속에 간직되다 1945년 광복 후에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정에 다시 게양된 바 있다. 한국전쟁 때에는 조동식 교장이 태극기를 옷 속에 꿰매고 괴나리봇짐 속에 넣어 피난하는 등 소중하게 간직해 온 태극기로, 이러한 내용은 종전 초등학교 5학년 도덕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다.
4괘는 검정, 태극문양의 양방은 홍색, 음방은 청색 옷감을 오려 표면에 덧대고 재봉틀로 박음질한 태극기로 태극문양은 상하로 껴안은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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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남상락(1892~1943)이 1919년 4월 4일 당시 독립만세 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부인과 같이 만든 것으로, 1986년 10월에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남상락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을 참관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했다가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 시위에 가담한 후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으로 내려와 동지들과 함께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됐다.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짠 견직물(명주)에 손바느질로 테두리를 마감하고 사괘를 검정실로 수놓았으며, 태극은 홍색실과 청색실로 수를 놓아 정성스레 만든 태극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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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일명 문수열)이 1945년 2월경 광복군 동료 이정수로부터 선물 받은 태극기로, 1946년 1월 문웅명이 타 부대로 이임하자 동료 대원들이 서명해 준 태극기이다. 태극문양과 4괘는 옷감을 덧대고 재봉틀로 박음질해 제작한 태극기로 1986년 8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태극기 바탕에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염원하며 결의를 다지는 글귀와 서명이 빼곡히 적혀있고 70여 건의 서명 중 김국주는 제17대 광복회장, 김영일은 제18대 광복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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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종 소위가 1950년 10월 초 호남지구 진격 작전시 사용한 태극기로 1987년 1월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손으로 급히 만든 듯한 태극기로 태극문양은 물감으로, 4괘는 먹물로 그렸으며, 바탕에 청색 펜글씨로 백두산에 태극기를 휘날리겠다는 각오 등 무운장구를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이 적혀있고 지명이 기록돼 있어 당시 전투 경로 등을 알 수 있다.
태극기의 전체적인 모양은 조잡해 보이나 전쟁 중 긴박한 상황에서 그린 것으로 동족상잔의 뼈아픈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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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경주에서 자원한 학병 19용사 등이 출정 전에 태극기에 각자 소감을 적고 서명 한 태극기로, 1987년 5월 최임준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현재의 국기 규격을 갖춘 판매용 태극기로 “우리의 죽음은 역사의 꽃이 되라”, “17세 붉은 피 오직 조국에!” 등의 글귀와 서명은 한국전쟁 중 학도병들의 굳은 의지와 각오를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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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특무상사였던 이철희의 유품으로 현재의 태극기 규격을 갖춘 날염된 태극기이다. 태극기 네 모서리에 “事變爆發(사변폭발)”, 맨 위에 “단기 4283.6.25日”이라는 글귀가 써 있으며, 태극문양 둘레에는 지명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상부 우측의 의정부를 시작으로 대구로 끝나는 지명은 북한군의 남침경로, 좌측의 부산, 영천, 경주, 충주, 이천, 10.5 서울입성, 승호리, 10.21 평양 등으로 적힌 지명은 국군의 북진경로로 보인다.
국군의 애국정신과 투철한 군인정신이 생생하게 표출돼 있고 치열했던 남·북의 진군경로 등 한국전쟁사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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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로 1986년 8월 고영준이 독립기념관에 관리 위탁했다. 상단 중앙에 ‘不遠復’ 글씨를 홍색으로 수 놓았고 태극문양과 괘는 천을 오려 2줄로 박음질했는데 태극문양의 양방은 홍색, 음방은 흑색이며, 마직물로 된 깃대 고정용 끈이 3개가 달려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와 싸우면서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는 신념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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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 걸렸던 것으로 전해지는 태극기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붕준이 부인과 함께 제작한 태극기이며 1983년 9월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위탁했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존속한 입법기관이다.
재봉틀로 두 폭의 천을 이어 박고 태극문양과 4괘는 천을 오려 박음질 했으며 1m 길이의 다회(여러 올의 실을 꼬거나 짜서 만든 끈)가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