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인터넷신문쪽을 베어서 항아리에 넣고 물을 넣어서 2-3일 추출한 다음 석회를 넣고 교반한 다음 윗물을 따라 내면 죽처럼 된다.
죽처럼 된 것은 앙금이라고도 하는데, ‘쪽 앙금이 침전(沈澱)된 아랫물을 시루에다 자리를 깐 위에 대고 끼얹으면 쪽물이 말랑말랑한 물엿처럼 처진다.
이 과정을 물을 친다고 한다(예용해. 1969.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제 4편 산업기술.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
물을 친 니람은 니람 상태로 거래가 되거나 보관을 해 두었다가 발효에 사용되었는데, 수분 함량이 많게 되면 거래시 정확한 계량이 어렵고, 운반도 불편해 탈수를 했다.
쪽죽의 탈수는 바구니, 시루 또는 가마니를 이용하는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바구니를 이용하는 방법은 바구니에 삼베천 등을 깔아 놓고, 죽 상태의 쪽 앙금을 넣으면 탈수가 되면서 니람(泥藍)이 된다. 시루를 이용하는 방법은 시루 밑바닥에 천을 깔아 놓고, 쪽죽을 넣어서 탈수했다.
가마니를 이용하는 방법은 나주 영산동 가마태마을에서 취했던 세계 유일의 방법이다. 쪽 염료에서 가마니의 이용은 가마니를 만들어낸 일본에서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가마니는 쪽염료인 스쿠모를 담는 용도로 사용된다(사진은 일본의 쪽염료인 스쿠모를 담아 놓은 가마니).
나주 영산포에서는 쪽을 추출한 다음 쪽죽의 탈수 용도로 사용했다. 즉, “길거리에서 쪽을 가라앉힌 뒤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뒤안(뒤껻에 대한 사투리로 집 뒤에 있는 뜰이나 정원을 가리킨다. 실제적으로 집 뒤쪽의 처마와 뒷 집의 앞담 사이의 공간을 일컫는 예가 많다)에 돌을 놓고 그 위에 새로 짠 가마니를 벌려서 올려놓은 다음, 가마니 안에다 죽 같은 쪽을 부어 놓으면 수분이 빠졌어요(한0수, 83세. 2009년 9월 5일 영산동 산정리 가마태마을 자택에서 인터뷰)”.
이러한 증언에서처럼 영산포에서는 쪽염료의 탈수에 가마니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그 배경은 당시 영산포는 나주평야의 중심이고 가마니 생산량이 많은 것과 관련이 깊다. 1932년 4월 10일에 발행된 조선일보의 ‘사소한 이유로 가마니 매수권 박탈’이란 기사에는 “가마니로서 전 조선의 중심지대라고 하는 라주 영산포(羅州郡榮山浦)의 시세와 가티 매수케 하여 달라”는 내용이 있다. 나주 영산포가 전국 가마니 생산의 일번지 임을 나타내는 기사이다.
1933년 12월 23일에 발행된 동아일보 ‘제입검사가혹으로 생산자의 피해막대’라는 기사에는 “전남 나주군하에서는 가마니 직조가 농촌의 유일한 직업으로 추기를 지내서는 농민의 九(구)할 이상이 가마니를 짜서 생활을 지속하다고 한다.”라는 기사가 있다.
1933년 4월 15일 동아일보의 ‘만주행의 조선 가마니’에는 영산포에서 생산된 가마니가 철도를 통해 만주에까지 수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나주에서는 이처럼 가마니 생산이 많았으므로 쪽염료 추출에 가마니 이용이 이상하지는 않으나 가마니는 높이와 폭이 각각 1m가 넘을 정도로 컸다. 굴곡도 많아 골에 니람(泥藍)이 박히게 되면 허비되는 게 많게 된다. 그런데도 가마니를 이용한 것은 그만큼 쪽염료 추출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으며, 많은 양의 니람을 한꺼번에 쉽게 탈수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가마니를 이용해 쪽 죽을 탈수한 방법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방법으로 나주 선조의 지혜라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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